대한예수교장로회 축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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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새 생명의 의미 8 - 새 생명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롬 4:17-25절)(25절)
 이기남    | 2020·05·13 16:30 | HIT : 131 | VOTE : 1
* 새 생명의 의미 8 - 새 생명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롬 4:17-25절)(25절)







* 제 7 과의 목표..




이번 과는 「십자가 이후」, 예수님의 계속적이고 변함없는 「새 생명의 완성을 위한 사역」을 드러내는 과로서 「그리스도인의 소망」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구원의 법적 근거」라면, 「부활」은 「구원의 안전함」을, 「승천과 재림」은 「구원의 완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 제 7 과를 위한 준비..







1. 참고 도서..




『기독교란 무엇인가』(존 스토트), 『예수는 누구인가』(죠지 맥스웰)







2. POINT..




(1) 성경은 부활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고 선포합니다..




(2) 『사도행전』은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중요한 설교」의 중심이 모두 「부활」입니다(행 4:5-12절, 10:34-43절, 17:16-31절)..




(3) 「제자들의 변화」가 예수님의 부활의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 「나의 삶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는가?」








3.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







(1) <첫째로>, <로마서 1장 4절>을 보면,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주님이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이 역사적인 사실이, <예수님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시요, 우리의 왕이시라>는 것을 입증(立證)하였다는 말씀입니다..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에 합당한 분>이심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2) <둘째로>, <로마서 4장 25절>을 보면,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우리 범죄함을 위해서, 즉 죄값을 대신 지불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빚을 갚으러 간 사람이 붙들려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빚이 다 청산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복음」이 없는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첫째 아담이 「행위 언약」(창 2:17절)을 지키지 못해서 실패한 것을, 예수님이 둘째 아담이며 마지막 아담으로 이 땅에 오셔서 직접 <사시면서> 모든 율법을 다 지키시므로 <의를 획득하셨음을 확증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은혜 언약」(창 3:15절)을 성취하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고」, <살으시므로> 「행위 언약」에 따른 의를 획득하셔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한 믿음으로 의를 전가(轉嫁)시켜 주셔서 「의롭다고 해 주셨습니다..」







<창세기 2장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아담」은 열매를 먹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은 먹어서 실패한 죄의 값을 지불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고>, 처음부터 요구한 언약(율법)을 다 지켜내시므로 <부활하셔서> 우리를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즉 「살아나심」은 <우리의 죄가 다 청산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온전한 제사>로 제물이 드려지고 하나님께 열납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핵심은 <주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에 있는 것입니다..







(3) <셋째로>, "여자의 후손은 네(뱀,사탄)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창 3:15절) 하신 「원복음」이 성취되었다는 증거입니다..




<히브리서 2장 14절> 앞 부분은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혈과 육, 즉 육신을 입고 오셔야만 했습니까?







<히브리서 2장 14절 뒷 부분과 15절>을 보십시오..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주님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은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탄이 멸망」 당했음을 의미합니다..







(4) <넷째로>, 주님의 부활은 우리 부활의 보증이 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을 보면,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빌립보서 3장 21절>에는,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5) <다섯째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것은 <다시 오신다>는 「재림의 확실성」을 말씀해 줍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2,13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하나님의 나라 건설은 주님의 재림으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주님이 죽으시고 다시 사심이 없었다면 재림도, 완성도 없는 것이 됩니다..




주님은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 되십니다..







(6) <여섯째로>, 주님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부활 신앙은 <하나님의 나라 건설의 동력(動力)>이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는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의 기사가 있습니다.. 어찌하여 엠마오로 내려갑니까?




저들이 기대했던 소망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는 마음이 뜨거워져서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던 것입니다(눅 24:17,32,33절)..







주님의 다시 사심을 확신하게 되자 하나님의 나라 소망도 살아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순교 직전에 기록한 마지막 서신에서, 이렇게 고백하면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11-13절>을 보십시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주님이 붙잡히시고 죽으시는 고난의 현장(現場)에서 <제자들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그런 도망자요 부인자였던 겁쟁이들이 무슨 힘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19,20절)고 하면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을 수 있었습니까?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또 다른 증거가 됩니다.. 이토록 목숨을 내놓은 증인들이 있었기에 복음은 천하만민에게 전파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5장 14,15절>을 보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하여, <고린도전서 15장 17-19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라고 말씀합니다..







1. (1번 문제) 다음 구절들을 통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역」을 말하십시오..







(1) 추적점..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의 「예수님의 사역의 방향」을 드러내는 질문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습니다..







(2) 답..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다시 사셨습니다..」 할렐루야..




무덤을 깨뜨리시고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십자가가 역사적 사건이듯이 부활도 <역사적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역사 속에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역사 속에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이 땅에서 집중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는 어디서 만날 수 있습니까?







①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엠마오 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눅 24:13-35절)..




「슬픔과 두려움으로」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향하는 제자들>을 찾아 오셨습니다(눅 24:15절)..




부활하신 예수님은 「슬픔에 잠긴자를 찾아오십니다..」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십니다.."(찬송가 563장 3절 가사)







제자들이 못 알아본 이유가 무엇입니까? 분명 예수님은 같은 모양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죽을 때 그 모습으로, 그러나 엠마오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못 알아 보았습니다..




너무 믿음이 좋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었고, 다시는 살아나지 않을 것」 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닮았구나..」 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사실은 철저히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축사(눅 24:30절) 하실 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 봤습니다..




똑같은 말과 똑같은 모습으로 평소와 같이 <축사하시는 모습>을 볼 때, 제자들은 순식간에 예수님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 보자 곧 바로 예수님은 없어지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는데도 <예수님의 부활을 확실한 사실로 알고 방향을 바꿔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②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닫고 모여 있는 곳」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요 20:19-23절)..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찾아 오셨고(요 20:11-18절)」, 「두려워 떠는 제자들」을 찾아 오셨습니다(요 20:19절)..







예수님은 제자들이 문을 닫아 놓고 숨어있는 방에, 벽을 통과해서 들어 오셨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기도 하셨습니다(눅 24장, 요 21장)..







제자들과 같이 있지 않았던 「도마」는 <제자들의 증거>를 믿지 않았습니다..




사실 도마가 못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아무리 어려워도 <증인 2명>만 있으면 믿는다는 원칙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마를 위해」 다시 나타 나셨습니다(요 20:24절 이하).. 정말 예수님은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도마가 의심하면서 제자들과 한 말을 예수님께서는 그곳에 계시지 않았지만 「다 들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오셔서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도 다 듣고 계십니다..」 둘이서 악한 일을 도모하는 것도 다 듣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의 모습입니다..







이 모습을 보면 주님께 대한 깊은 애정이 생깁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괘씸 할 텐데, 우리 주님은 일부러 오셔서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같은 믿는 자」가 되시기를 바라십니다..




우리 주님은 「한 사람을」, 더구나 「약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찬송가 563장 3절)..







의심이 있습니까? 주님께 대드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도마에게 하셨듯이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도마는 우리를 대신해서 질문하고 확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20장 29절>에서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보지 않고 믿는다면> 최소한 우리는 도마 보다는 복이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③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디베랴 호수」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요 21:15-20절)..




예수님은 「실의에 빠진」 베드로를 만나서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좌절의 깊은 늪에 빠져있는」 베드로를 다시 세우고 선교에 동참케 하십니다.. 「사랑의 회복」이 이루어 졌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5-1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렇게 물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15절 앞 부분>을 보십시오..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왜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까?




예수님은 그에게 다른 많은 것을 물어 보실 수 있으셨습니다.. "동역자와 장모님은 안녕하시냐?" "그때 왜 세 번 나를 부인했느냐?" 등등..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그런 질문을 하지 않으시고 다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a. 첫째로, 예수님은 「베드로와 새로운 사랑의 관계성을 맺기 원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한 것은 사실입니다..




한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또 다른 때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그러나 이렇게 큰 소리치던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난 기간에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그가 왜 실패했습니까? 이는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고, 그의 인간적인 충성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하여 그와 새로운 사랑의 관계성을 맺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질문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로서는 참으로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었습니다..




그는 "예,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대신에 그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저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가 어떻게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까?




이는 그가 비치 파티(beach party)를 통해서 「예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 오셔서 조반을 지어 주시고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하실 때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녹았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 순간 예수님을 통해 그의 마음에 심겨진 하나님의 사랑은 싹이 나서 탐스러운 꽃봉오리처럼 피어났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대한 사랑 고백을 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의 사랑을 심령 깊이 영접>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사랑을 영접했을 때 마음의 모든 슬픔과 운명이 사라졌습니다..




장래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대신에 하늘 나라의 기쁨과 평화가 그의 심령에 강같이 흘렀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사랑을 영접했을 때 그의 모든 인생 문제는 순식간에 해결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길은 먼저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영접하는 것>임을 배웁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은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였음이라."







사람에게는 많은 문제가 있는 것 같지만 오직 두 가지 뿐입니다.. 하나는 <죄>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 문제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받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여도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는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할 때 아무리 인간의 사랑을 많이 받아도 전혀 사랑을 받지 못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사랑과 빛과 생명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랑은 생명의 근원이요, 빛은 생명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영접해야만 합니다.. 그때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심령 깊이 영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은 내 마음에 샘이 되어 끊임없이 솟아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사랑이 필요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b. 둘째로, 예수님은 「베드로가 진실된 사랑을 고백하기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여기서 <이 사람들> 또는 <이것들> 이란 「예수님 풀러서(+) 알파」를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것들도 사랑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면서 마음 속 깊이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랐을 때 직장과 가정과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꿈만은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의 꿈은 지상 메시야 왕국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꿈 때문에 모든 어려움을 참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동시에 꿈도 사랑했습니다..>




그가 이런 인간적인 꿈을 가지고 있는 한, <예수님께 대한 순수하고 진실된 애정 고백>을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베드로를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그와 같은 은밀한 꿈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네가 이 사람들(또는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질문하심으로 꿈을 부인하고 예수님께 진실된 사랑을 고백하기 원하십니다..







c. 셋째로, 예수님은 「베드로를 하나님의 양무리의 목자로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세 번>이나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처음 두 번은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세 번째 질문하실 때는 마음에 근심이 생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같은 질문을 세번이나 하시는가?> <내가 예수님을 세번 부인했기 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에게든지 이런 식으로 압력을 가한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만은 매우 심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때마다 동시에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번이나 같은 질문을 반복하신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베드로는 예수님의 양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모든 허물과 약점을 감당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목자의 삶>을 보여 주심으로 그를 「양무리의 목자」로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뒤를 이어 하나님의 양무리를 돌보는 선한 목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나타내는 길」은 <예수님의 양을 돌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양을 먹이는 목자의 삶」은 희생과 아픔이 따릅니다.. 그러나 이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삶」입니다..







2. (2번 문제) 우리의 구원과 예수님의 부활과는 어떤 관계입니까?







(1) 추적점..




<예수님의 부활과 새 생명과의 관계>는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전면적이며, 절대적이며, 생명적>임을 드러내는 질문입니다..







(2) 질문의 태도..




부활을 앞에 놓고 우리가 가져야 할 <질문의 태도>는 「어린 아이와 같은 태도」여야 합니다.. <생산적인 질문>이어야 합니다..







(3) 성경이 죽음을 강하게 강조하는 이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 사건도 역시 같은 선상에서 역사적 사건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죽음>을 여러 방향에서 강력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요 19:28절, 33,34절, 38-42절).. 예수님의 「부활」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4)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은 부분을 할애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한 사실이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한치의 의심도 없었습니다..




의심이 있었다면 <죽음>에 대한 의심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가사 상태>가 아니었는가?」 하는 의심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의 죽음을 철저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5) 성경은 부활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선포」하고 있습니다..







(6) 「사도행전」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메세지(행 4:5-12, 10:34-43절), 스데반의 메세지(행 7:37-53절)와 삶(순교 / 행 7:54-60절), 사도 바울의 메세지(행 17:16-31절)..




이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흩어졌던 제자들이 모였고, 교회가 세워졌으며, 그 교회들이 계속 이어져서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주일」은 예수님이 부활한 안식 후 첫날을 매주 기념하는 것입니다..







(7)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메세지..




지금 이 부활의 사실을 믿는 자에게 이 부활은 언제나 「현실」이며, 이 부활의 신앙을 받고자 하는 자는 언제나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 위에 신앙이 놓여져 있지 않기 때문에, 「사소한 일들」로 염려하는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가져다 주는 충격이, 신앙 안에 아직도 없기 때문에 삶이 「옹졸하고 째째해지는 것」입니다..




하찮은 명예 때문에 벌벌 떨고, 자신의 취미 생활 때문에 예수님께 드리는 헌신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직장 상사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기도 하고, 친구에게 자랑스러운 존재가 되려고 도덕적으로 더 타락한 행동을 서슴치 않고 행합니다..







(8) 예수님의 부활의 가장 확실한 증거는 무엇입니까?




「제자들의 변화」입니다.. 「제자들의 돌변」이 예수님의 부활의 가장 확실한 증거임을 '제임스 스튜어트'는 그의 책 『예수의 생애와 교훈』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는 부활을 증명하는 삶을 사는가?」




「나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가?」







(9) 답..




① 로마서 4장 17-22절..




<로마서 4장>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예로들어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설명하는 장입니다..




<4장>의 구조를 보면 「<1-8절>은 아브라함이 <행위>로 구원 받지 않았다, <9-12절>은 <할례>로 구원 받지 않았다, <13-16절>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 받지 않았다.. <17-22절>은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23-25절>은 <믿음의 내용>이 제시 되는데 그것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나님께서 자손을 주실 것을 약속 받았고, 100세에는 약속의 성취로 이삭을 나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가 폐경 임에도 불구하고 이삭을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계속 기다리다가 완전히 100% 아기를 낳을수 없을 것임을 확인한 후에도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약속대로 「이삭을 받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어떠함>을 깊이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인간 쪽의 소망이 다 끊어졌어도 하나님으로서는 가능하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절실한 마음으로 깨닫게> 하셨습니다..







* 하나님께는 능치 못한 일이 없습니다(창 18:13,14절)..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 하나님으로는 가능합니다(막 10:27절)..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결과>(폐경임에도 자손을 주실 것을 믿은 것)와 <우리의 믿음의 결과>(부활)가 같습니다..




<17절 뒷 부분>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 부활의 하나님」 이십니다..







* 합리성의 극치 - 믿음의 대상을 하나님으로 삼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것입니다..




사람이나 어떤 권력자나 가짜 신이 아니라, 창조주이시며 부활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합리성의 극치>입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자로서 담대하게, 이 세상을 거스르며(롬 12:1,2절) 살아 가시기를 기도합니다..







② 로마서 10장 9,10절..




부활을 믿어야 구원을 얻습니다.. - 부활 신앙 (빌 1:20,21절)(고전 15:56절)







(10) 균형 / 십자가와 부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같은 무게로 강조해야 합니다..







* 로마 카톨릭 - 십자가 안에 예수님의 모습이 있습니다..



이것은 죽음을 상징하고, 죄의식을 끌어 냅니다.. 결국 소극적이고, 금욕적인 생활을 유도합니다.. "내 탓이오.."(고해 성사)




"내 탓이오.." 이것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는데, 왜 내가 그걸 다시 붙잡고 있습니까?







* 개신교 - 십자가 안에 예수님의 모습이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동시에 상징합니다.. 부활은 기쁨을 끌어내고, 결국 적극적, 축제의 생활을 합니다..







① 십자가(죽으심) 만 강조하면..




「금욕주의자」가 됩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지 않습니다.. 거세를 하고 부부간의 정상적인 섹스 조차도 죄악시 합니다.. 그리고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소식하거나 금식을 합니다..




고의로 고난에 참여합니다.. 마틴 루터가 빌라도의 계단을 무릎으로 올라갔던 것(중세의 <고행>)도 그런 이유입니다.. 이 <고행>은 나중에 <자기 의(義)와 우월감>이 됩니다..







「폐쇄적인 자」가 됩니다..




그래서 <피해망상증>에 걸린듯이 생활합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고립되고. 친구가 없습니다.. 경건주의 같으나 사실은 <고난주의>입니다.. <자학>합니다.. 이것은 정신 질환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소극적인 사람」이 됩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보면 아주 <겸손한 모습>으로 보입니다..







② 부활(살으심) 만을 강조하면..




「과욕주의자」가 됩니다.. 그래서 자꾸 뭔가를 과시하려고 합니다..







「자유분방한 자」가 됩니다.. 그래서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적극적인 사람이 됩니다..




<적극적인 사고방식>이 한국 교회의 문제점으로 남아 있는 것도 여기에 기인합니다.. 이들은 지나쳐서 <인간의 능력으로도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겸손없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들의 모습은 능력을 위장해서 나타납니다..







(11) 십자가 앞에 꿇어 엎드린 적이 없는 부활의 기쁨은 없습니다..




엄청난 능력도 십자자를 통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냄새가 납니다..




"no cross, no crown" (There's not a crown without a cross)







3. (3번 문제) 그리스도인의 죽음에 대한 태도는 어떠해야 합니까?







(1) 추적점..




성도들이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와, 부활의 소망을 소유한 자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이기신> 「죽음」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를 드러내는 질문입니다..







(2)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왜 육체의 죽음이 있습니까?




신자의 성화를 위해(롬 8:29,30절), 완전한 새 몸을 입히기 위해, 본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입니다..




「我國在天」 - 연세대 김중기 교수님이 어렸을때, 한 시골교회 목사님께 받아서 평생 삶의 지침으로 삼았다는 글입니다..









(3) 기독교에서는 죽음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① 첫째, 한마디로 <죽음의 보편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Why me?"가 아니라 "Me too." 입니다.. 왜 내가 죽느냐가 아니라 나도 죽는다는 것입니다..




의인이건 악인이건, 부유하건 가난하건 죽음 앞에서는 모두 평등합니다.. 공평합니다.. 다 죽는 것인데 굳이 슬퍼할 것도 없습니다.. 보편성을 믿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죽음에 관한 한 우리는 이 엄연한 사실,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죽음에 예외란 없습니다..







② 둘째, 성경은 계속하여 <안식>을 말씀합니다..



죽음은 안식입니다.. 쉬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4장>에서도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13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수고를 그치고 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루 종일 일하고 저녁에 잠드는 것이 바로 죽음의 연습입니다.. 안식의 연습입니다.. 의식이 없어지기에 잠은 죽음입니다..




잠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깊은 잠을 자는 사람에게는 서너 시간 잔 것이 겨우 5분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은 깊은 잠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편안히 쉬는 것입니다.. 안식입니다..




우리가 일만 계속하고 쉬지를 않는다고 해보십시오.. 얼마나 고단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인생 길을 다 간 다음에 쉬게 됩니다.. 깊은 안식을 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일시적이요 임시적입니다.. 내내 이토록 잠들어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잠들었다가 깨는 것입니다..>







③ 셋째, 죽음은 <자기 완성>입니다..




평생 동안 살아온 모든 삶을 결론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이 중요합니다.. 사람답게 죽어야 합니다..




그가 평생을 어떻게 살아왔든 간에 마지막에 가서 순교하면 그는 일생을 순교적으로 산 것이 됩니다.. 순교자가 됩니다.. 마지막에 나라를 위해서 죽으면 순국자가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마지막이 중요한 것입니다.. 마지막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자기 완성의 시간인 것입니다..







④ 넷째, 죽음은 <도덕성을 가집니다..>




죽음과 함께 그 일생을 심판받아서 한 사람은 영생에로, 한 사람은 영원한 사망에로 각각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은 심판입니다.. 이래서 사람은 누구나 두려워합니다..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심판성>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꼼짝 못하고 일생 살아온 것을 평가받아야 할, 냉정하게 하나님 앞에서 평가받아야 할 그 시각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영국의 정치가 윈스턴 처칠(Churchill, Winston) 경이 죽어 런던에 있는 성 바오로 교회당에서 장례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장례식을 거행할 때에 나팔수가 종탑 위에서 나팔을 두 번 불었다고 합니다..







요즘도 국장(國葬)같은 경우에는 군인들이 예포를 쏩니다.. 총을 쏘기도 하고 대포를 쏘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나팔을 불었는데, 첫 번째 분 나팔은 취침 나팔이었다고 합니다.. 고이 잠들라는 것입니다.. 잠시 후에 분 나팔은 기상 나팔이었다고 합니다.. 일어나라고 부는 것이 기상 나팔입니다..」







여기에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생명이 새롭게 시작되기 때문에 <기상 나팔>을 마지막으로 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죽음에 대한 인식입니다.. 이 세상을 다 마치고 완성하고 결론짓고 매듭짓고, 또 다른 세계로 향하는 출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1장>에서 죽음을 가리켜 잔다고 말씀하십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에도 그리하셨습니다..




죽었다고 아우성치고 우는데 예수님은 그 집에 들어서시면서 <울지 마라, 아이가 잔다> 하셨습니다..




보시지도 않고 잔다고 하십니다.. <죽었는데 잔다고 하시네> 라면서 사람들이 비웃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죽음이 아닙니다.. 다시 일으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숨이 넘어가건 맥박이 멎건 문제되지 않습니다.. 일으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잔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잠이기에 일단 안식이요 또한 깰 것입니다.. <잠이기에 깨우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생명을 넘어 깨우는 자,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복음 11장 11절>에 보면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라고 말씀 하십니다..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날에 나팔 소리와 함께 오셔서 모든 성도들을 깨우실 것입니다..







(5)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① 첫째, 천국은 「비할데 없이 아름다운 곳」입니다(계 21,22장)..




성경의 하나님은 미(美)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하나님은 그의 지으신 세계를 보시고 "보시기에 좋았다" 고 했습니다.. 천국에서는 미가 완성될 것입니다.. 형태와 색채와 소리의 완전함이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답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지상의 그 어느 것도 이에 비교할 수 없습니다..







현재 우리의 모든 감각과 인식 능력은 죄로 가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속된 몸을 가지게 될 때」에는 모든 감각 능력이 확장되어 완전한 상태로 존재할 것입니다..







이 땅에서도 아름다운 장면들은 많이 있습니다.. 설악산, 백두산 천지, 나이아가라 폭포 등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저 영원의 아름다운 성」에서 우리를 반겨 줄 광경과 소리와 향기의 완전한 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자 우리가 그렇게 아름다워하는 설악산은 하나님이 <7일> 동안 지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천국은 <2천년> 동안 지금도 지어지고 있습니다.. 설악산과는 비교가 안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3절>을 보십시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이 말씀을 하시고 가신지 <2천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천국은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비교도 안되지만 굳이 비교해 본다면 「7대 730,000(2,000년 x 365일)」 입니다..




천국은 이 곳보다 <100,000배>나 더 아름다운 곳입니다.. 천국은 비할데 없이 아름다운 곳입니다..







② 둘째, 천국은 「최상의 교제의 장소」입니다(마 8:11절)..




인류 역사에서 가장 순결하고 고상하며 이타적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를 믿음으로써」 천국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다윗, 엘리야, 다니엘, 바울, 베드로, 요한, 스펄젼, 무디, 조나단 에드워즈, 로이드 존스, 이기풍, 주기철, 손양원, 한경직 목사님 등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곳에서 우리는 「천사들」(눅 1:19절, 15:7-10절)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고귀한 존재들, 곧 가브리엘, 미가엘, 그리고 모든 천군 천사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곳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게 될 것입니다(대하 6:30절).. 물론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시지만, 천국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임재하시는 곳이요, 특별히 자신을 나타내시는 곳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될 것입니다(행 7:56절, 히 4:14절, 히 8:1절)..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십니까?




나를 위해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온갖 고통과 수치와 배반과 조롱을 다 당하신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 이십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천국에 대해 가장 마음이 끌렸던 한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었습니다(빌 1:23,24절)..




<찬송가 85장>은 이렇게 찬양합니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이렇게 좋거든 주 얼굴 뵈올때에야 얼마나 좋으랴"(1절)







천국에 없는 것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27절>입니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천국의 교제는 이 땅에서의 교제와는 달리(고전 13:12절) <기쁨의 한계>가 없습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마음을 완전히 열어 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기쁨의 재회(살전 4:17절)를 할 것입니다.. 헤어졌던 자들이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찬송 480장)..







③ 셋째, 천국은 「영광스러운 자유가 있는 장소」입니다..




천국은 지상에서의 우리들의 삶을 파괴시키는 모든 것들, 즉 죄, 질병, 고통, 가난, 굶주림, 헐벗음, 죽음 등으로부터 벗어난 곳입니다..







천국에는 죄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에는 빈곤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무궁 무진한 하나님의 부요를 원하는 대로 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롬 8:17절)..




천국에는 고역도 없습니다.. 이제 고된 노동은 끝입니다(히 4:9절)..




천국에는 질병이나 고통도 없습니다(계 21:4절).. 연약, 한숨, 신음, 눈물, 고통 등은 이제 끝입니다..




천국에는 죽음도 없습니다..







④ 넷째, 천국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완전한 지식을 갖게 될 것」입니다(고전 13:12절)..




교육을 가장 적게 받은 자라 할지라도 그 진리의 대양을 헤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사람, 시간, 영원 등에 대한 난해한 문제들도 해결될 것입니다..




어떠한 의심, 의문, 모호함, 오류 등도 우리를 괴롭히지 못할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들」이 모두 실제의 존재로 드러날 것입니다..







⑤ 다섯째, 천국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완전한 사랑을 갖게 될 것」입니다(요일 3:2절)..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 4:8절).. 우리는 천국에서 하나님과 같이 될 것입니다..




「천국에서의 사랑」은 이땅에서의 사랑과 같이 「망설이거나, 미심쩍어 하거나, 이기적 이거나, 변화무쌍 하거나, 눈물의 씨앗이 되는 사랑」이 아닙니다..







⑥ 여섯째, 천국은 「찬양의 장소」입니다(계 7:9-12절)..




사람들의 눈이 열려 하나님을 계신 그대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영혼들이 어떻게 찬송을 터뜨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도 찬송을 힘없이 부르는 성도들은 회개하셔야 합니다..







(5) 답..




① 빌립보서 3장 20,21절..




「기다리던 곳」(20절) - 시민권이 100% 발휘되는 곳으로 입성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곳으로의 안식과 평안과 영광<환희>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낮은 몸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화하는 것입니다(21절)..







② 고린도후서 4장 16-18절..




속사람의 새로움을 향하여(16절), 영원한 영광을 위하여(17절), 보이지 아니하는 것을 위하여(18절)..







③ 고린도전서 15장 51,53절..




변화하리라(51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죽지 아니함을 입습니다(53절).. <참고> 시 116:15절, 사 57:1,2절, 계 14:13절, 빌 1:21절, 롬 8:29,30절..







4. (4번 문제)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 지금 어떤 일을 하고 계십니까?







(1) 추적점..




부활 이후 <승천하신 예수님의 계속적인 사역과 그 내용>을 드러내서, 그리스도인에게 <구원 이후에도 계속적인 주님의 인도하심이 있음>을 말해주고, 천국을 소망케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2) 답..




① 요한일서 2장 1,2절 / 「대언자」




우리는 죄를 짓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죄를 지으면 우리에게는 「대언자」가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손에 못자국, 허리에 창자국, 머리에 가시관 자국을 그대로 가지고 승천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구원의 안전성」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안심하고 신앙 생활을 하시기를 기도합니다(롬 8:28-39절)..







② 로마서 8장 34절 /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는자」(성령님도 간구하십니다<롬 8:26절>)




<하나님의 우편>은 <권세의 자리>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할렐루야..




이제는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라」"(요 14:13,14절)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우리는 누려야 합니다.. 거지 같이 살 필요가 없습니다..」







③ 요한복음 14장 1-6절 / 우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고 계십니다..







④ 마태복음 28장 30절 / 우리와 「동행」하고 계십니다..







(3) 승천 (행 1:8-11절)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세히 보는데 올라 가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더 이상 예수님을 찾아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할 일을 깨달은 것」입니다..







5. (5번 문제) 주님께서 오늘 오신다면 당신은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1) 추적점..



이 문제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고,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 승천, 재림 사역이 한 개인에게 어떻게 효력이 발휘되는지를 <개인적>으로 물어 보는 질문입니다..







(2) 답..



(요 5:24절)(요 6:37절) 새 생명을 가지고 준비해야 합니다.. - (요 13:1절)(계 22:20-21절) 「구원의 안전성」(「구원의 완성성」)







(3) 징조 (마 24:32-51절)



노아의 때 (38절) - '먹고, 마시고'(경제) 장가들고, 시집가고'(sex) / 경제와 섹스로 유토피아 건설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때가 올 것입니다(비교/딤전 4:7절)..







(4) 메시지..


  
  창세기 33 - 불가능하게 보이는 최선을 갈망하라 (17:1-27절)(5절)  이기남 20·05·23 72
  창세기 32 -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17:1-27절)(1절)  이기남 20·05·09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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