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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 창세기 20 - 셈의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9:18-29절)(26절)
 이기남    | 2024·04·10 19:45 | HIT : 70 | VOTE : 7
* 창세기 20 - 셈의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9:18-29절)(26절)





지난 시간 우리는 <창세기 8,9장>을 통해서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두시고 <하나님께서 보신다>(9:16절)고 했습니다. 이 무지개는 「하나님의 무지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함으로써> 이 무지개를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눈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구름 사이에 두신 <언약의 무지개>가 보입니다.



「언약의 무지개」를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시고, 보존하고 계시는 사실>에 감격하여 감사할 수 있습니다.





* 감동 받기...



① 하나님께서 <언약의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두신 사실에 감동을 받습니다.



② 「믿음」이란 <우리가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우리가 알고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③ <신앙 생활>이란 하나님께 받은 감동에 대해 <예배와 찬송과 감사로 반응하는 생활>입니다. (성경 공부 -> 예배 -> 헌신)





그런데 믿음의 눈이 없어도 사람들이 잘 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다른 사람의 허물>입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나 약점>입니다.



다른 것은 잘 안보이는데, 그런 것들은 어떻게 그렇게 선명하게 잘 보이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3절)



<남의 허물을 크게 보는 것>은 어찌보면 <모든 사람의 공통점>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본다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본 것을 꼭 말하고 싶어 합니다.



어떤 사람은 본 사실만을 말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추측과 추리를 섞어서 확대 과장하여 말하곤 합니다.



그 과정에서 남의 허물은 과장되고, 상대적으로 자신은 그 사람에 비해 훨씬 더 괜찮은 사람으로 포장되곤 합니다.





우리는 이런 일들을 일상적으로 행하고 경험하기 때문에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문제와 갈등, 오해, 분쟁들이 여기서 나온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러한 행동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9:18-29절)은 <남의 허물을 보았을 때>(23절) 어떻게 해야 하는지와, 노아가 <셈의 하나님을 찬송한 의미>(26절)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해 줍니다.





그런데 우리가 읽은 이 짧은 본문은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해석 상의 난제들이 있는 본문입니다.



읽고 나서 언뜻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은, 홍수 이전에 그토록 의롭고 흠 없는 사람으로 인정되던 <노아의 행동>입니다.





행동에 흠이 없던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장막에서 벌거벗고 눕는 추태를 보였습니다.>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잠에서 깬 후에 작은 아들 함이 자기에게 한 행동을 알고는, <함의 막내 아들인 가나안을 저주한 것입니다.>





당사자인 함을 저주했다고 해도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작은 아들의 아들, 즉 자신의 손자를 저주한 것은 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도대체 함은 어떤 잘못을 저질렀기에 아버지 노아로부터 자신의 막내 아들이 저주를 받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을까요?



<18,19절>에 보면,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입니다.



그런데 성경 저자는 여기서 특별히 함이 <가나안의 조상>이라는 것을 언급합니다. 함과 가나안의 연관성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킵니다.





이 세 명은 노아의 아들들이며, 이 세 명을 통해 온 땅에 사람들이 퍼졌다고 말씀합니다.



즉 노아의 아들들인 셈과 함과 야벳은 온 땅에 사람들을 퍼뜨릴 수 있는 단 세 명의 남자들입니다.





노아가 자식을 더 낳았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사실상 인류의 운명은 세 명의 남자들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이제 인류는 노아의 세 아들을 통해서 번성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9:1절)..



노아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아, 자녀들을 낳고 번성하여 땅을 채워야 할 사명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이 어릴 때부터 악하지만>(8:21절), 그럴지라도 그들이 이 땅을 채우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염려가 생깁니다.



<만약 「생각이 어릴 때부터 악한 사람들」이 땅을 가득 채운다면 이 땅은 어떻게 될까?>



<홍수 이전 시대처럼 이 땅에 악이 가득차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홍수로는 심판 받지 않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을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되지 않도록 <심고 거두는 일,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 이라는 <자연의 순환을 통한 제어 장치>를 두셨습니다(8:22절). (하나님의 일반 은총, 성령님의 일반적 사역.)





이로써 사람의 악한 생각이 증폭되거나, 심화되는 것을 차단하셨습니다.



사람이 어려서부터 악하지만, 홍수 이전의 사람들처럼 <무한정 악해지는 것>(사람이기를 포기할 정도로)을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보다도, 어릴 때부터 생각이 악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바라크, ברך) 이란 단어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무릎 꿇다>(to kneel)는 의미, 다른 하나는 <좋게 말하다>(to bless)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무릎을 꿇고」,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좋게 말하는 것」이 <악을 극복하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어릴 때부터 악한 생각을 품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 악을 이기며 살 수 있도록 <복>(바라크,ברך)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셈과 함과 야벳>은 하나님이 주신 <복>을 받아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복을 자신들의 <후손들에게> 물려 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시작부터 불길한 사건이 터져 버리고 맙니다. <20절>에 보면, 노아는 농사 일을 시작했는데,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노아가 어디서 포도나무를 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포도나무 농사를 지었으니 자연스럽게 포도주를 담그게 되었을 것입니다.





포도주를 담궜으니 포도주를 마시게 되었을 것이고, 한 잔 마셔보니 향이 너무 좋고 맛도 좋아, 한 잔 더, 한 잔 더... 주욱 마시다가 그만 취해 버렸을 것입니다.





포도주에 취하자 몸에 열이 났을 것이고, 입고 있던 옷을 다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장막에서 뒹굴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노아가 상습적으로 포도주를 마시고 취했었는지, 아니면 생전 처음 포도주를 마시고 취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홍수 심판의 충격이 너무 커서, 그때의 고통을 잊어버리려고 포도주를 마시다가 습관성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포도나무를 재배하고 처음 포도주를 담가서 무슨 맛인지 알아보려고 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취했을 수도 있습니다.





알 수는 없지만, 어느 경우든, 노아는 포도주에 취했고 벌거 벗은 채 장막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가나안의 조상 <함>이 보았습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서 형제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22절).





그러자 <셈과 야벳>이 옷을 가지고 와서 어깨에 걸친 다음, 뒷걸음질로 장막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덮어 드렸습니다(23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잠이 들었던 노아가 깨어났습니다. 노아는 자기 아들 함이 자기에게 한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말이 <25-27절>입니다.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노아가 한 말의 핵심은 가나안이 저주를 받아, 셈과 야벳의 종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두 가지 질문을 갖게 됩니다.





① 하나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왜 노아는 셈을 칭찬하지 않고,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했을까(26절)?>



노아는 셈의 줄기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덮어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실 예수님을 (여기서 먼저)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 3장>에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던 하나님>(21절)을 생각하게 합니다.



부끄러움을 가려 주었던 그 가죽 옷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하는 것이었습니다.





* 구속사(요 5:39절) / 원복음(창 3:15절) -> 가죽 옷(창 3:21절) -> 아벨의 제사(창 4:4절) -> 다른 씨 셋(창 4:25절) -> 노아(창 5:29절) -> 셈의 하나님(창 9:26절) -> 아브라함(창 22:18절) -> 다윗(삼하 7:16절) -> 예수 그리스도(요 19:30절).





② 또 하나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도대체 함이 무슨 일을 했기에, 그 일이 얼마나 심각하기에 노아는 저주까지 하고, 또 왜 함을 저주하지 않고 함의 막내 아들인 가나안을 저주했을까?>


잠에서 깬 노아는 <작은 아들 함이 자기에게 한 일>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작은 아들 함이 노아에게 한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본문을 아무리 읽어봐도, 작은 아들 함이 노아에게 <직접적으로 한 일>은 찾을 수 없습니다.



다만 <간접적으로 한 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벌거벗은 아버지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형제들에게 그 사실을 알린 것입니다.





<작은 아들 함이 자기에게 한 일>이 만약 이것을 가리킨다면, <이런 일을 가지고 아들의 아들, 즉 손자를 저주까지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이 사실을 <저주받을 일>로 취급하고 있기에, <우리는 함이 한 일을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함은 셈과 야벳에게 아버지가 장막에서 술에 취해 벌거벗고 누워 있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함이 한 일은 그 후에 셈과 야벳이 한 일과 대조를 이룹니다.





함은 사실을 알렸고, 셈과 야벳은 벌거벗은 아버지를 옷으로 덮어 드렸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소한 행동의 차이 같은 함과 셈과 야벳의 행동은 큰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장막에서 벌거벗고 누워 잠들었다는 것은 노아가 자신의 수치를 드러냈다는 의미입니다.





인사불성이 되어서 자식에게 아버지로서 보이지 말아야 할 허물을 보인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노아가 실수를 한 것입니다. 약점을 노출한 것입니다.



노아가 허물을 보였고, 함은 아버지의 허물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형제들에게 말했습니다.





<사실>을 말한다고 할 때, 소위 우리가 쓰는 말로 <팩트 체크>를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함은 허물을 보인 아버지의 현재 모습을 팩트로 말했습니다. 그런데 팩트를 말하면 잘못이 되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오랜 동안 친하게 지내던 세 친구>가 있다고 칩시다.



C라는 친구가 A라는 친구의 허물을 B라는 친구에게 말하면서, <이것은 팩트야. 나는 다른 의도가 없어. 너에게 팩트만을 말하는 거야.>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C의 잘못이 가려질까요?





더군다나 그 대상이, 부모이거나, 마땅히 존경해야 할 사람이거나, 깊은 신뢰 관계를 쌓은 사람이라면, 팩트만을 말했다고 해도 적지 않은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좀 더 생각해 보면, 우리가 누군가의 허물을 말할 때 완전한 의미의 <팩트만 말하기>는 어떻게 보면 불가능합니다.



이미 그 허물을 말한다는 자체부터 말하는 사람의 판단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허물은 말하는 순간 그것은 팩트가 되지 않습니다.



허물을 말하는 데는 <팩트냐 아니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허물을 말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함이 노아의 허물을 말한 순간> 함은 아버지 노아를 판단하고 비난한 것이 되었습니다. 함은 아버지 노아를 좋게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함은 <좋게 말하는 사람의 조상>이 되어야 했지만, 노아의 허물을 보는 순간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어릴 때부터 악한 마음의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함은 아버지의 허물을 보고 마음의 갈등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할까, 아니면 덮어 드릴까.>



함은 이 마음의 싸움에서 악에게 졌습니다. 함은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 드리는 대신, 아버지의 허물을 형제들(그 당시에는 온 인류)에게 알리는 쪽을 택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토록 의롭고 흠 없이 산 아버지도 이런 사람이다.> 라고 알리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자신에 대해 나쁘게 말한 함에 대해 노아는 어떻게 말했습니까?



자신에게 나쁘게 말한 함에 대해서 노아는 직접적으로 나쁘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의 막내 아들인 가나안에 대해서 나쁘게 말했습니다.





노아가 가나안에 대해서 나쁘게 말한 것에 대해서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는>, 함은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취소할 수 없었고, 대신 가나안을 저주한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노아도 어쩔 수 없는 죄인의 모습을 보였다는 견해입니다.





<다른 하나는>, 노아의 저주는 개인적인 감정에서 나온 것이라기 보다는, 「예언의 의미」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나쁘게 말한 함의 자손 중에서 가나안이 아버지의 행실을 닮게 되고 그로 인해서 스스로 저주를 불러오게 된다는 견해입니다.



가나안이 함의 자손이어서가 아니라 함처럼 악하게 행동하기 때문에 저주를 받는다고 예언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답을 알 수는 없습니다. 성경이 말씀한 데까지만 가고, 거기서 멈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복을 주셨고>, <복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서 좋게 말하는 습관을 들이고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새로운 인류의 조상이 될 셈과 함께 야벳에게 복을 주셨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인류는 하나님께 복을 받은 존재이고,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무릎 꿇고(예배와 섬김)>,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해 좋게 말하는(찬양과 칭찬)> 사람으로 살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우리는 이와는 정반대로 살 때가 많습니다.



복을 받았는데, 복을 받지 않은 사람처럼 행동했던 함처럼, 우리도 복을 받은 사람으로 살기보다는 어릴 때부터 품었던 악한 생각을 따라 살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어릴 때부터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 무릎 꿇지 않고, 사람들에 대해서 나쁘게 말하는 것이 본능처럼 자연스럽고 편안한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을 배우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아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우리가 여전히 그렇게 살아도 되겠습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의 허물을 알리고자 하는 악한 생각과 싸워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볼 때, 근질근질한 입을 다무는 대신, 허물을 덮어 주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 좋게 말하는 사람이 되고자 힘써야 합니다.





「* 삼묵(三默) 훈련...





신대원 졸업반 때 제게 가장 유익했던 시간은 「목회실습」시간 이었습니다.



당시에 목회를 직접하고 있었던 저는 이 시간이 늘 기다려 졌었습니다. 당시에 충무교회를 담임하시던 박종렬 목사님이 아주 엄하게 강의해 주셨습니다.



삼묵(三默) 훈련은 바로 그 때 배웠던 말씀입니다. 이 훈련은 그리스도인이라면 꼭 받아야 할 훈련입니다.




첫째, 묵상(默想) 훈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묵상해야 합니다. 소가 새김질 하는 것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두고 두고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둘째, 과묵(寡默) 훈련입니다.



대인 관계에 있어서는 과묵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감정에 대하여, 자기 자신의 공적에 대하여, 남의 결점에 대하여, 남의 과실에 대하여는 과묵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무조건 과묵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일이 잘못되어 가는 것을 볼 때, 공인으로 의사 표시를 해야 할 때, 책망을 해야 할 때는 말을 해야 합니다.




셋째, 묵종(默從) 훈련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는 묵종해야 합니다.



지금 나로서는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뜻을 묵묵히 순종해 나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주권>(요 19:30절)과 <하나님의 선하심>(롬 8:28절)을 믿기 때문입니다.




겸손하게 다시 이 삼묵 훈련을 시작하렵니다.」




서로에게 말해 보십시오. “앞으로는 좋게만 말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 좋게만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지 잘 압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듭니다.



<좋게만 말하는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지 않나? 허물이 있으면 지적하고 비판도 해야 고칠 것이 아닌가?>





물론 성경에서도 아주 예외적으로 부모에게 자녀의 허물을 교훈하고 책망하여 바르게 하도록 허락합니다.



그러나 허물은 비판과 지적으로 고쳐지지 않습니다. 허물을 말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고, 더 큰 죄를 낳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비판하지 말라”(마 7:1절)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허물을 드러내시거나, 지적하거나, 비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과 실수, 약점과 연약함을 드러내시고 지적한다면, 팩트만 말한다고 해도 우리는 살아 남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생각이 악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과 실수, 죄악을 덮어 주십니다. 마치 죄인이 아닌 것처럼 예수님 안에서 <의롭다>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 비유>(마 18:21-35절)에서 <우리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볼 때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잘 말씀해 주셨습니다.





부모도 사람입니다. 목회자도 사람입니다. 자녀도 사람이고, 성도들도 사람입니다.



남편도 사람이고, 아내도 사람입니다. 선생님도 사람이고 학생도 사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허물이 있습니다. 실수를 범합니다. 허물을 말하기 보다 덮어 주는, 복받은 자로 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합니다(2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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