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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구속사적 성경 개론 15 - 에스라 (6:14-22절)(14,15절)
 이기남    | 2024·04·06 09:47 | HIT : 67 | VOTE : 6
* 구속사적 성경 개론 15 - 에스라 (6:14-22절)(14,15절)





에스라서의 주제는 스룹바벨이 주도한 성전 건축과 에스라가 주도한 개혁 운동입니다.





에스라서의 서두(스 1:1-3절)는 역대하의 끝 부분(대하 36:22,23절)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사 왕 고레스의 조서로 되어 있습니다. <에스라 1장 3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고레스는 그가 태어나기 약 2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일에 들어서 쓰실 것이 이름까지 성경에 예언 된(사 44:28-45:4절) 흔치 않은 인물 중 하나입니다.





그렇다고 성경은 고레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습니다.





<에스라 1장 1절>은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하고 시작되는데, 「말씀을 응하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중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렘 29:10절, 25:11,12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다"(1:1절)고 에스라서는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라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6장>까지는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하는 기사인데,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주도(主導)하에 진행되고,



<7-10장>까지는 에스라가 주도한 개혁(改革)을 전개하는 내용입니다.





"에스라"는 스룹바벨이 주도한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에 등장하는데 연대를 감안할 때 느헤미야와 동역한 것이 됩니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구속사의 맥락(脈絡)에 있어서 새로운 시대가 전개되는 시기입니다.





열왕기상하를 통해서는 "죄"라는 원인(原因)으로 말미암아 "심판"이라는 결과(結果)를 가져와 바벨론에 포로가 됨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를 통해서는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포로에서 귀환하게 하시는 "회복기"를 맞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열왕기상하가 "문제"(問題)라면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해답"(解答)인 셈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그럴만한 자격이나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라, 여기에는 중요한 구속사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명예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에 포로로 방치 되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과 명예가 걸려있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행함(돌아오게 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겔 36:22절) 하십니다.





둘째는 계획하시고 언약하신 바를 이루시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세워주신 언약은 세 마디로 되어있는데, 「땅을 주리라, 자손을 주리라, 네 자손으로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점에서 "땅을 주리라" 하신 땅은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실 땅을 예비 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언약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실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와야 했던 것입니다.





셋째는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포로에서 돌아오게 될 예표가 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서는 바벨론 포로 귀환과 복음 시대를 복합적(複合的)으로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스라서의 중심 주제(主題)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70년의 포로 기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폐하여 지거나 중단됨이 없이 지속적으로 추진되어 나오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1장>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신 하나님은 또한 포로 된 자들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빼앗겼던 그릇들을 가지고 돌아오게 하십니다.





<2장> 귀환한 자들의 수를 기록하고 있는데 "온 회중의 합계가 42,360명이요 그 외에 노비가 7,337명이요 노래하는 남녀가 200 명이요"(64,65절) 라고 합니다.





<3장> 돌아온 자들이 최우선으로 한 일은 "제단을 그 터에 세우고 그 위에서 아침저녁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다"(2,3절)고 말씀합니다.





여기 중요한 요점이 있는데 번제단을 다른 터가 아닌 "그 터"에 세웠다는 데 있습니다.





"그 터"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절) 하신 "그 터"요,





다윗에게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으라,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대상 21:18,26절) 한 "그 터"입니다.





또한 그 터는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대하 3:1절) 한 "그 터"인 것입니다.





이점을 좀 더 추적한다면 모세가 죽기 전에 유언한 "유월절 제사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각 성에서 드리지 말고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드리라"(신 16:5,6절)한 "그 터"인 것입니다.





"그 터"를 구속사라는 맥락으로 추적하면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1절) 한 그 터로 귀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 터"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유일한 "터"인 것입니다.





<4장> <3장>에서 "그 터" 위에 세우기 시작된 성전 건축은 <4장>에서 방해에 부딪쳐 중단되게 됩니다.





그 원인은 앗수르의 혼합 정책에 의하여 혼혈(混血)족이 된 사마리아인들이 "우리도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 같이 너희 하나님을 찾노라"(4:2절)고 제의해 온 것을,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4:3절)고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이점에 대해 우리의 판단은 무엇입니까? 그들의 제의에 대해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유다 지파와 베냐민의 대적들에게 성전 재건에 동참을 거부한 것은 혼합주의자들과 타협을 거부한 것입니다.





<열왕기하 17장 33절>에 "그들이 여호와를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다"라고 혼합 종교가 생겼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들의 제의를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입니까?



칠십년 징벌을 당하고도 또 혼합 종교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남은 자"들이 복음을 보수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도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2절)고 접근해 왔을 때 거절한다면 방해 공작을 감행해 오리라는 것은 예상된 것입니다.





타협이냐 박해냐, 이것은 오늘날의 교회가 직면한 과제입니다.



만일 박해가 두려워 혼합 주의자들과 타협하고 만다면 그들이 건축한 성전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혼잡하게 하려는 속임수가 실패로 돌아가자, 그들은 본색을 드러내어 맹렬하게 대적을 해왔고, 그래서 성전 건축은 14년 정도 중단이 되게 됩니다.





그러나 "유다 사람의 장로들이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의 권면을 따랐으므로 성전 건축하는 일이 형통한지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명령과 바사 왕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따라 성전을 건축하며 일을 끝내되,



다리오 왕 제 육년 아달월 삼일에 성전 일을 끝내니라"(6:14,15절)





드디어 제 2의 성전을 완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누가 방해할 수 있단 말입니까, 누가 중단 시킬 수 있단 말입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9절)





<5장>에서는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격려에 힘입어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시작하매"(2절) 하고 중단되었던 성전 건축을 다시 재개합니다.





<6장>은 에스라서의 핵심 장입니다. 드디어 "다리오 왕 제육년 아달월 삼일에 성전 일을 끝내니라"(15절)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기타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즐거이 하나님의 성전 봉헌식을 행하니"(16절) 라고 합니다.





주목할 점은 "이스라엘 지파의 수를 따라 숫염소 열두 마리로 이스라엘 전체를 위하여 속죄제를 드렸다"(17절)는 대목입니다.





이 말씀은 5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분단되었던 남북이 아픔의 상처를 딛고 하나로 재결합됨을 보여줍니다.





앗수르로 끌려간 북쪽 이스라엘은 영영 돌아오지 못하였지만 그들 중에 경건한 자들은 남쪽 유다에 귀순하여 열두 지파의 명맥은 끊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에스라와 함께 2차로 돌아온 자들이 번제와 속죄제를 드렸을 때도 "이스라엘 전체를 위한 수송아지가 열두 마리요 또 숫양이 아흔여섯 마리요 어린 양이 일흔일곱 마리요 또 속죄제의 숫염소가 열두 마리니"(8:35절) 라고 합니다.





이점에 관하여 에스겔 선지자는 "그들이 한 나라를 이루어서 한 임금이 모두 다스리게 하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아니할지라"(겔 37:22절)고 예언했던 것입니다.





나아가 이 말씀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영적인 통일을 전망하는 말씀입니다.





포로 귀환과 성전 건축을 주도한 스룹바벨은 유다 19대 왕 여호야긴(여고냐, 대상 3:16-19절)의 손자임을 역대상의 족보는 밝혀 주고 있습니다.





스룹바벨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도 올라있는데(마 1:12절),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느냐 하면 포로 기간 중에도 다윗의 "왕위"는 끊어짐이 없이 이어져 내려왔음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개혁 운동은 1차 귀환으로부터 약 80년 후에 제 2차로 귀국한 에스라에 의해 주도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6장>과 <7장> 사이에는 약 80년의 공백 기간이 있는 것입니다.





에스라는 "대제사장 아론의 16대손"(7:5절)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7:6절)라고 말씀합니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7:10절)하고 올라 왔다고 말씀하는데 "연구, 준행, 가르침"이라는 순서가 중요합니다.





에스라가 주도한 개혁 운동의 초점은 성별(聖別)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포로에서 귀환한 후에도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9:2,3절)하고 혼합(混合)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스라는 자복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9:6절) 라고 합니다.





이를 듣는 우리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구제 불능이라는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홍수 심판을 10번, 100번을 내려도, 불 심판(바벨론 포로)을 10번, 100번을 내려도 인간의 자력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점을 철두철미 보여주고 있는 것이 역사서의 기록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니 우리가 남아 피한 것이 오늘날과 같사옵거늘 도리어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이로 말미암아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9:15절) 라고 진술합니다.





하나님은 이 자력 구원의 불가능성을 빨리 깨닫고 인정하기를 원하십니다.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이 예상됨으로 한마디 부언합니다만 성별의 삶도 메시아 언약을 보수할 때만이 가능하여진다는 점을 역사서가 보여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은혜를 놓치게 되면 윤리에도 실패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포로 귀환, 즉 회복기의 역사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남은 자"라는 주제입니다.



이점을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사 10:22절)라고 예언한 바입니다.





"남은 자"라는 주제는 포로 귀환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홍수 심판에서 보는 바대로 인간의 소행으로는 멸절될 수밖에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남은 자"를 있게 하신 것이 구속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 즉 메시아 언약은 언제나 소수의 "남은 자"에 의해 계승되었던 것입니다.





에스라도 기도하기를 "우리의 악한 행실과 큰 죄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당하였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 죄악보다 형벌을 가볍게 하시고 이만큼 백성을 남겨주셨사오니"(9:13절)라고 진술합니다.





성전을 중건한 후 단행된 에스라의 개혁 운동의 초점이 이방 족속과 서로 섞이게 된 통혼 문제가 중심 과제가 된 것도(9:1,2절) "남은 자" 에 대한 성별과 정화와 결부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태어나야 할 혈통을 보존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게 되는 구속사적 의미는 애굽 바로의 종이 되었다가 해방된 것과는 다릅니다.





출애굽 사건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구원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세례를 의미하는 홍해 도하의 「물」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 포수로부터의 귀환은 사탄의 포로에서 돌아오게 될 예시요, 징벌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불」이 강조되어 있습니다(렘 1:13,14절).





그래서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슥 3:2절)고 말씀하십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불처럼 쏟으셨도다"(애 2:4절)고 자기 아들에게 쏟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불가마 속에 집어넣어서 연단하신 목적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이에 대해서 이사야서는 바벨론으로 끌려갈 것을 말씀하시면서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사 6:13절) 하고, "거룩한 씨'를 남겨 두시기 위해서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스라서에는 "여호와의 손"이 자주 등장합니다(7:9,28절, 8:18,22,31절).





이것은 포로에서 귀환할 수 있었던 것이나 성전 중건 및 개혁 운동 등이 여호와의 선한 손이 이루셨음을 뜻합니다.





<이사야 45장 1절>에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그 앞에 열국을 항복하게 하며"라고 말씀하는데,



여호와의 손이 고레스와 스룹바벨과 에스라 등을 붙잡으셔서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에스라서를 통해서 오늘날의 교회에 말씀하시려는 불변의 진리는 무엇입니까?





에스라서의 두 축을 이루는 성전 재건과 백성을 거룩하게 하는 개혁 운동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절) 하신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 이라는 각성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7절) 하신 "성별의 삶"으로 우리에게 적용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남은 자"라는 주제가 우리에게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은 신약 성경에서도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롬 2:28절),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롬 9:6절),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롬 11:5절)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표면적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 아니요,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그리스도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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