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 축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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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 창세기 21 - 바벨탑 (9:18-11:26절)(11:9절)
 이기남    | 2024·04·17 20:15 | HIT : 68 | VOTE : 8
* 창세기 21 - 바벨탑 (9:18-11:26절)(11:9절)





오늘은 <바벨탑 사건>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아울러 <바벨탑 사건의 앞뒤에 있는 사건과 족보>를 통해 반복되는 <인간의 죄의 역사>와 그 사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소망의 역사>를 조망하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경계해야 할 죄가 무엇이며>, 또 <따라야 할 길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9장 18절>을 보십시오.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었습니다.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였습니다.





노아는 방주에서 나온 후 포도 나무를 심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계절이 적절하게 순환했기에(8:22절) 포도 농사가 잘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노아는 큰 실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벌거벗은 채로 장막에서 곯아 떨어져 버렸습니다.





홍수 이전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는 칭송을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던 사람이 이런 추한 모습을 보여 주다니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방주를 짓는 과정에서 느낀 고독과 스트레스 때문에 알코올 중독에 빠져 버렸는지, 아니면 홍수 이후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려 나가자 영적 긴장감도 함께 풀려 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노아도 사람이기에> 허물이 없을 수는 없었습니다. 문제는 이 모습을 보게 된 <노아의 아들들의 반응>입니다.





가나안의 아버지인 「함」이 제일 먼저 아버지의 허물을 보게 되었습니다. 「함」은 그 모습에서 묘한 쾌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권위를 무너뜨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왔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말했습니다.





「함」은 아버지의 허물을 형제들에게 고자질했습니다. 이에 <셈과 야벳>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9장 23절>을 보십시오.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셈과 야벳은 아버지가 비록 실수했더라도 아버지의 명예를 존중하여 그 허물을 덮어 주었습니다.





그 후 술이 깬 노아가 아들들이 자신에게 행한 일을 알고서 어떻게 했습니까?





노아는 함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하고 셈과 야벳은 <축복>했습니다(9:25-27절).



저주의 내용은 가나안이 그의 형제들의 종이 되기 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의문점이 하나 생깁니다. 노아가 왜 당사자인 함이 아니라 함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했을까요?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 명쾌한 해답을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후대의 <가나안 족속의 모습>과 <함의 모습>이 겹쳐진다는 점입니다.」





<가나안 족속>은 함이 아버지에게 반역했듯이 하나님께 반역했습니다.>





극심한 성적 타락으로 이어져 그들 가운데 부도덕한 행위들이 거리낌 없이 자행되었습니다.



결국 노아의 예언대로 가나안은 셈의 후손인 이스라엘에 의해 진멸 당하고 남은 자들은 종이 됩니다.





반면에 「노아」는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준 <셈과 야벳>을 축복했습니다.





<노아는 먼저 셈의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것은 <셈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을 예고한 것이었습니다.(구속사)





또한 <노아는 야벳이 창대하게 되어 셈의 장막에 거하게 되리라>고 축복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셈이 받을 복에 야벳도 동참하게 되리라는 예언>이었습니다.





여기서 보면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주었느냐 그렇지 않았느냐>가 저주와 축복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왜 이것이 후손들의 미래를 결정할 정도로 중요한 문제입니까?



그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노아 이야기 속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6장>부터 지금까지, <노아와 함께 하신 하나님>은 「덮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처음에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소개되었습니다(6:9절).



하지만 이 말이 노아가 아무 허물과 실수가 없는 완전무결한 사람이란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허물을 덮어주셨기 때문에 의롭다 여김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 앞 절(6:8절)에 노아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장 21절>에서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의 허물과 죄악을 다 드러내지 않으시고 <덮어주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무지개 언약>이란 결국 「하나님의 덮어주시는 은혜」를 증거하는 언약입니다.



노아의 세 아들이 이때까지 생존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덮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덮어주시지 않으셨다면 그들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홍수 때 물고기 밥이 되었을 것입니다.





만약 「함」이 이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아버지의 허물을 보고 어떻게 했겠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덮어주시는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서 셈과 야벳처럼 아버지의 허물도 덮어주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함은 이 은혜를 무시했습니다. 이것이 그가 저주를 받게 된 이유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덮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범죄한 아담에게 「가죽 옷」(3:21절)을 지어 그 벌거벗음을 덮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출애굽 때에 「문설주에 바른 어린 양의 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덮어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언약궤 위의 뚜껑을 「속죄소」라고 합니다. 이 「속죄소」라는 말은 원어로 <캅포레트, כפרית (화해, 덮어주다)>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왜냐하면 대제사장이 짐승의 피를 속죄소에 뿌릴 때 사람의 허물과 죄가 가려지고 덮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짐승의 피가 아닌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주홍같이 붉은 죄를 흰 눈처럼 덮어줍니다.



이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를 일일이 다 들추어 내신다면 우리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숨이 막혀서 도저히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자존감은 바닥을 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는 보고서도 안 본 것처럼 대해 주십니다. 다 아시면서도 모른 척 해 주십니다.





이 덮어주시는 은혜를 받은 사람에 대해 <시편 32편 1,2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허물의 사함을 받는 것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죄가 가려지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은혜요 선물입니다.





우리는 이 덮어주시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도 형제 자매의 허물을 덮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그 자리에 없는 사람 흉을 보고 허물을 들추어 내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누가 나를 씹을까봐 불안해서 모든 모임에 다 참석한다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과 같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십자가로 우리 허물을 덮으신 주님의 은혜를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도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들추고 떠벌리기를 즐거워한다면, 그 순간 <저주 받은 함의 자손>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타인의 허물을 묵묵히 감당해주면서 그의 명예를 지켜줄 때 우리는 <복 받은 셈의 후손>이 됩니다.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덮어주시는 은혜>(창 3:21절, 창 9:23절)를 누리며 그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또 이 은혜에 기초해서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며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10장 1절>을 보십시오.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으니”





<10장>은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입니다.



<2-5절>까지 등장하는 「야벳의 후손」은 지중해 연안을 중심으로 헬라와 소아시아 지역으로 흩어졌습니다.



<21-31절>까지 기록된 「셈의 후손」은 바벨론 지역으로 갔다가 함의 세력에 의해 산이 많은 지역으로 밀려났습니다.





「함의 후손」은 <6-21절>까지 가장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북아프리카와 바벨론과 가나안 지역을 다 차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애굽, 앗수르, 바벨론 등과 같은 고대의 대제국들이 함에게서 탄생했습니다.



모두 세계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유명한 나라들입니다.




함의 손자 니므롯은 홍수 이후 세상에서 첫 용사로 유명했습니다.



<니므롯>이란 이름의 뜻은 <우리가 반역하리라>입니다. 함의 손자다운 이름입니다. 그는 사냥의 달인이었습니다.





니므롯은 남자들의 롤 모델이며 당대의 영웅이었습니다.



마침내 니므롯은 명성과 인기를 바탕으로 정치 권력까지 손에 넣었습니다.





나라를 세우고 큰 성읍들을 건축하였습니다. 그의 기반이 시날 땅인 것을 볼 때 <11장>의 <바벨탑 사건>의 주역도 니므롯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앞선 <9장>에서 분명 노아는 셈과 야벳은 축복하고, 함의 후손을 저주했습니다.



사사로운 감정에 따라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예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곧이어 나오는 <10장>의 족보에서 셈과 야벳의 후손은 크게 번성하고, 함의 후손은 쫄딱 망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정반대로 흘러갔습니다. 도리어 더 강대하게 된 것은 함의 후손입니다. 유명한 나라와 인물은 다 함의 계보에서 나왔습니다.





이후 셈의 후손들은 함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들에게 내내 눌려서 지냅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노아의 예언은 다 허언에 불과했던 것입니까?





이 지점에서 우리는 질문을 날카롭게 해야 합니다.



<복과 저주를 어떤 관점에서 보고 있는지?> <세상에서 유명한 사람이 되고 남들이 우러러 볼만한 부와 권력을 차지하는 것이 복이고, 그렇지 못하면 저주인 것인지?>





우리는 여전히 <복과 저주를 세상적인 관점, 기복 신앙의 관점으로 보기 쉽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과 저주>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입니다. 명성과 권력이 기준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일어났던 대제국 애굽, 앗수르, 바벨론은 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다 무너졌습니다.





하나같이 잔인하고 탐욕스런 제국주의 국가라는 오명으로 후대에 기억되고 있습니다.





반면 셈의 후손으로 이스라엘이 나왔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 계보에서 메시아가 탄생했습니다.



셈의 후손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고 그의 말씀을 귀로 들었습니다. 그들 중에 열두 사도가 배출되었습니다.





야벳은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처음 전파되었던 소아시아와 헬라 지역이 야벳의 후손들이 정착한 땅입니다.





사도 바울이 누비고 다녔던 안디옥, 에베소, 빌립보, 고린도 등등이 바로 그곳입니다. 이 얼마나 큰 영광이고 복입니까?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는 것이 가장 큰 복입니다. 아무리 유명해지고 강성해지면 뭐합니까?





하나님이 한번 치시면 명성이든 부든 권력이든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다 날아가 버립니다.



그래서 아무리 잘 나간다 하더라도 하나님 없이 사는 백성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세상 나라의 영웅들, 유명하다는 이들을 너무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손해와 고생이 따르면 어떻습니까?



우리는 이미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말씀과 언약을 따라 사는 복 받은 백성입니다.





<11장>을 보십시오. 홍수 이후 노아의 후손들의 언어는 하나로 통일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홍수로 텅 비게 된 땅을 가득 채우기 위해 동방으로 이동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시날 평지를 만났습니다.





시날은 사방으로 지평선이 보이는 광활한 대평원 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습니다. <바로 여기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그들은 고생스럽게 더 전진하느니 그냥 시날 평지에 계속 머무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 가운데 획기적인 기술 혁신이 일어났습니다.



이전까지는 돌과 진흙을 이용해서 집을 지었습니다. 이 공법으로는 단층집만 지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구운 벽돌과 역청을 이용한 새로운 건축 공법이 개발되었습니다.





이 신공법 덕분에 인류는 비로소 고층 건물을 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술 발전에 한층 고무된 인간들은 이때 무슨 계획을 세웠습니까? <11장 4절>을 보십시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그들은 성읍과 탑을 건설하고자 했습니다. 여기서 성읍이란 인구 밀도가 높은 대도시를 말합니다.



탑은 석가탑, 다보탑 같은 기념물이 아니라 사람이 들어가 살 수 있는 초고층 아파트를 가리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시골보다는 도시를, 단독 주택보다는 아파트를 더 선호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모로 더 편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고자 했던 이유는 단지 편리함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내려는 야망 때문이었습니다..



흔히 쓰는 표현 중에 <하늘을 찌를 듯한 교만>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비유로만 알았는데 그들은 바벨탑을 쌓아 실제로 하늘을 찔러 보려고 했습니다.



기껏해야 이제 겨우 벽돌 좀 굽게 되었을 뿐인데 기고만장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둘째로> 그들은 하나님 없이 자신들만의 왕국을 구축하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의 힘은 머릿수와 조직력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그들의 구호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였습니다.





인간의 힘에 의해 유지되고 인간의 결정에 따라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자신들만의 왕국을 구축하는 것이 그들의 꿈이었습니다.





하늘을 향해 하나님 없이도 사람끼리 충분히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11장 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사람들은 전무후무한 거대한 도시를 만들었다고 자부했습니다.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겠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위에서 내려다보실 때는 이것들이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질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아래로 내려오셔야만 했습니다.





그들을 보신 후 하나님은 인류의 미래를 염려하셨습니다.



만약 이대로 내버려 두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진 인간들이 대형 사고를 내게 될 것이 뻔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무한대로 자신의 힘을 팽창시키려는 인간의 야망을 꺾고자 하셨습니다. <11장 7,8절>을 보십시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하나님이 선택하신 방법은 인간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탑을 쌓기는커녕 서로 싸우기만 하다가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인류 최초의 초대형 프로젝트는 미완성으로 그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이후로 그 땅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바벨은 <혼잡>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흩어짐을 면하려고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바벨탑 건축은 실패하고 사람들은 흩어졌습니다.





실패했으니 낙심하고 화낼 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리어 감사해야 합니다.



사실 바벨탑을 쌓은 자들은 홍수로 쓸어버려야 마땅했습니다. 그 죄질이 아주 나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쓸어버리는 대신 더 이상 범죄하지 못하도록 막으셨습니다.





그들을 흩으심으로 자의든 타의든 생육하고 번성하여 온 땅에 충만하라는 복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때로는 실패하고 좌절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 없이 바벨탑을 쌓고자 하는 인간의 죄악은 역사를 초월하여 계속되었습니다.



바벨탑 사건은 함의 후손인 애굽, 앗수르, 바벨론에서 또다시 재현 되었습니다.



페르시아 제국, 헬라 제국, 로마 제국 등 수많은 강대국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일 제 3제국의 히틀러는 총통이 된 후 독일 교회 목사들에게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이나 잘 다스리시라고 하시오. 이 땅은 나 히틀러가 책임지겠소.”





처음에는 유럽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러나 동부 전선의 패배를 기점으로 내리막길을 걷더니 노르망디 상륙 작전으로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처럼 인간이 교만해져서 스스로의 힘으로 무언가를 추구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망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아직까지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지식인들을 사로잡은 책이 한 권 있습니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이제 인류는 영원한 젊음을 얻고 창조와 파괴라는 신의 권능을 가질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다>고 주장합니다.



그 근거는 생명 공학, 인공 지능, 나노 기술 등의 과학 혁명입니다.





이 책이 50개국에 번역되었고, 20개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3년 반 전에 초판이 인쇄되었는데 지금까지 131쇄를 발행했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여전히 하나님 없이 바벨탑을 쌓는데 큰 매력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이 인류가 이 길로 계속 간다면 환경 오염, 자원 고갈로 전 생태계의 존립을 위협받을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혼돈 상태에 빠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바벨탑을 쌓으려 했던 사람들의 방향과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가면 됩니다.





바벨에 모인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름을 내고자 했습니다. 반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게 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의 첫 번째 기도 제목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입니다.





교회는 자나 깨나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도록 기도하고 열망하는 공동체입니다. 바벨탑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건설에 동참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 교회가 내 이름 또는 우리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을 높여 드리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찬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끊임없이 흩어져 개척해야 합니다. 사람은 기회만 있으면 안주하려는 본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끊임없이 개척하고 도전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교회가 개척 정신과 도전 정신을 잃으면 생명력을 잃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억지로 흩으시기도 하십니다.



어떨 때는 <외부의 박해>로, 어떨 때는 <내부의 갈등>을 통해서 흩으십니다.





* 흩어지지 않으면 흐트러뜨림을 당합니다..





<사도행전 8장 1절>을 보십시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사도행전 1장 8절>에 순종하지 않으면, <사도행전 8장 1절>의 결과로 나타납니다.





억지로 흩어지면 아픔이 따릅니다.



그러므로 순종하는 자세로 기쁨으로 자원하여 개척하는 것이 가장 좋은 일입니다.



그때 우리는 살아 있는 교회, 영적 생명력이 충만한 공동체가 됩니다.





우리가 편하게 현실에 안주하려는 본성을 부인하고 개척하고 도전하라 하신 사명과 복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벨탑 사건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들이 온 땅에 흩어진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리라고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이들이 흩어짐으로 온 세상에 불신 세력이 가득해질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1장 10-26절>에 「셈의 족보」가 등장합니다. 여기서 셈의 족보를 기록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는 <새 소망의 역사를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 보라>는 뜻입니다.





셈의 족보는 <26절>에 나오는 <아브람>으로 이어집니다.



<아브람>은 믿음의 조상으로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만민 구원 역사를 위해 택함 받은 자입니다.



<창세기 12,13,15,17,22장>에 계속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집니다.





이는 어두운 시대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셋의 후손 중 노아를 부르시어 새 인류의 역사를 시작하신 것처럼, 셈의 후손 중 아브람을 불러 새 역사를 시작하고자 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볼 때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 영광을 구하는 죄악을 반복해 온 역사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 노아마저도 말년에는 추한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노아의 아들 함은 아버지를 욕보였습니다.





함의 손자 니므롯은 하나님께 반역하는 나라를 세웠습니다.



바벨탑 사건은 인간의 교만과 반역의 정신이 한 군데로 집약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하나님은 이런 가운데서도 인류 구원 역사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이루어 가신다는 점입니다.





누구를 통해서 입니까?



셈처럼 하나님의 덮어주시는 은혜를 아는 사람을 통해서> 입니다.



<아브람처럼 겸손히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을 통해서> 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과 함께 새 역사를 시작하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누구의 후예입니까?



<망령된 함의 후예입니까?> 아니면 <덮어주심의 은혜를 아는 셈의 후예입니까?>



<교만으로 똘똘 뭉쳐 바벨탑을 쌓은 인본주의자들의 후예입니까?> 아니면 <믿고 순종하는 아브람의 후예입니까?>





우리는 <자기 영광을 위해 바벨탑을 쌓는 길>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며 자기를 부인하는 자기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길이 생명의 길, 진리의 길입니다. 세상에 이 길을 가는 사람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우리가 이 길을 가고자 하기에 이 땅에 아직 소망이 있습니다.





저마다 자신의 바벨탑을 쌓는 시대 가운데 우리는 끝까지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참여하는 그 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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