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 축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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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8일 주일 설교 - 지금은 겸손할 때입니다 (벧전 5:5-7절)(7절)
 이기남    | 2020·03·06 14:53 | HIT : 207 | VOTE : 1
* 설교 - 지금은 겸손할 때입니다 (벧전 5:5-7절)(7절)



저는 우리 축제교회 성도님들에게 3가지를 자주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용서에 대한 확신」입니다.. 둘째는 「천국에 대한 소망」입니다.. 셋째는 「염려하지 말라는 메시지」입니다..







「용서에 대한 확신」은 <구원의 확신>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의 확신 가운데 살아가는 새 생명의 삶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은 <예수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주님께서 오실 날을 기다리며 천국 백성으로 밝고 행복하고 빛나는 삶을 살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염려하지 말라는 메시지」는 <성령님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계속 살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염려하지 않기 위해」 「성경 공부」를 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모든 염려는 성경 말씀을 모르는데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성경 공부」를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마 6:25-34절)를 분명하게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영적 전쟁은 진리 대결입니다.. 말씀에 대한 정확한 숙지가 중요합니다..







또한 우리는 「염려하지 않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단도직입적으로 염려하지 말라(빌 4:6,7절)고 했습니다.. 그리고 「염려가 있던 공간」을 「기도」로 채우라고 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걱정을 피하는 최고의 방법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염려하지 않기 위해」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는 「겸손」하여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길 수 있어야(벧전 5:5-7절) 합니다.. <6,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오늘 본문의 『베드로전서』는 사도 베드로가 썼습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앞에 있는데도 물 위를 걸을 때 물에 빠질까봐 걱정했습니다(마 14:29-31절)..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예수님께 무슨 일이 일어날까봐 걱정했습니다.. 그래서 검을 빼들어 로마 병사들에게 대항하려고 했습니다(요 18:2,3,10절)..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을 걱정한 나머지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 감히 십자가의 길을 가시지 말라고 했습니다(마 16:22절)..







그렇지만 「사도 베드로는 염려로 인해 계속되는 문제들을 겪으면서 <그것을 다루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전해 줍니다.. 오늘 본문 <베드로전서 5장 5-7절>을 보십시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오직 겸손을 통해서만 모든 걱정들을 하나님께 온전히 넘겨드릴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1. 겸손의 옷..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맞는 딱 한 가지 사이즈의 옷」을 만드셨습니다.. 이 옷은 세상에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겸손의 옷」입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은 그것을 입으라는 명령을 받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5절) 고 말할 때, 그는 마음 속에 구체적인 한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끈이나 매듭으로 자신에게 무언가를 맨다>는 의미를 지닌 헬라어를 사용했습니다..







그것은 특별히 「작업용 앞치마」를 가리킵니다.. 지저분한 허드렛일을 할 때 앞치마를 두르듯이 노예들은 청결함을 유지하기 위해 옷 위에 앞치마를 둘렀습니다..







고대 사람들은 겸손을 미덕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그 시대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겸손한 사람들은 조롱당하고 무시를 받습니다.. 세상은 그들을 겁쟁이라고 부르고 대신에 자랑을 찬양합니다..







<요한복음 13장>에 기록된 사건을 떠올려 보십시오..




거기서 예수님은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4,5절)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더러운 발을 씻지도 않은 채 이제 막 저녁을 먹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바닥 매트 위에 비스듬히 누워 식사를 하던 당시 고대 근동 지방에 있어서는 문제가 되는 행동이었습니다..




인원이 어느 정도 되면, 한 사람의 머리가 다른 사람의 발 가까이에 놓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식사를 하기 전에 집에서 제일 지위가 낮은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의 발을 씻겨 주는 것이 관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 중 아무도 이런 「종의 역할」을 하려고 나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모두에게 「겸손한 봉사의 본」을 보여 주시려고 직접 나서신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줄 때, 어떤 일도 우리 아래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서로를 향한 겸손이라는 옷을 입어여 합니다..」




누군가가 나서서 궂은 일을 할 때까지 기다리면 안됩니다.. <빌립보서 2장 3-5절>을 보십시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다른 누군가를 자기 자신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겸손」은 <우리가 도전해서 투쟁하여 쟁취해야 할 과제>입니다..




「교만과 이기심은 타락한 우리 인간의 육체 안에서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다시 우리의 본이 되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아버지와 더불어 높임을 받는 상태에 계시다가 우리를 섬기기 위해 수치스러운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낮추셨는지> 계속해서 이야기했습니다(빌 2:6-8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겸손의 복을 누리는 첫걸음은 <가치 없는 것들조차 섬기기 위해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능하신 손..

사도 베드로는 서로를 향해 「겸손의 옷」을 입으라는 간곡한 권고를 하기 위해, <잠언 3장 34절>의 말씀을 인용했는데, 그것이 오늘 본문 <베드로전서 5장 5절>의 말씀입니다.. 다시 한번 보십시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겸손을 보이는 일에 강렬한 동기를 부여해 주는 귀절입니다.. 스스로를 낮춘다면 복을 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벌을 받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교만을 대적하십니까?




간단히 말해, 하나님은 교만을 싫어하십니다.. <잠언 6장 16절>에 따르면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라고 했습니다..







그중 제일 앞에 오는 게 바로 "교만한 눈"(17절) 입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교만을 미워하시는 강력한 이유>는 인류의 타락을 가져온 죄가 바로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그러한 파멸을 야기한 유혹자가 지닌 치명적인 결점이기도 합니다..







교만에 찬 「루시퍼」는 그의 마음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사야서 14장 13,14절>을 보십시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하나님의 은혜는 겸손한 자의 몫입니다..」 <이사야서 57장 15절>을 보십시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하나님은 높은 곳에 사십니다.. 그런데 누가 그분과 함께 삽니까? 높고 힘있는 자가 아니라, 「겸손한 자」, 「낮은 자」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을 내가 돌보려니와"(사 66:2절) 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결론을 내셨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는 복을 주시지만, 교만한 자는 대적하십니다..」







교만하여 하나님의 은혜에서 제외되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모습이 무엇입니까? 「염려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고쳐보려고 애쓰지만 아무도 거기서 해방되지 못하고 모두 걸려 넘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문제를 해결할 어떤 방법을 찾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교정의 손길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들이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겸손하라고 권고합니다.. 오늘 본문 <베드로전서 5장 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여기서 「하나님의 능하신 손」이란 「하나님의 다스리는 능력」을 상징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항상 직접 그분의 주권적인 목적을 이루어가고 계심을 알고 있습니다..」 <욥기 30장 20-23절>을 보십시오..







"내가 주께 부르짖으나 주께서 대답하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돌이켜 내게 잔혹하게 하시고 힘 있는 손으로 나를 대적하시나이다. 나를 바람 위에 들어 불려가게 하시며 무서운 힘으로 나를 던져 버리시나이다. 내가 아나이다 주께서 나를 죽게 하사 모든 생물을 위하여 정한 집으로 돌려보내시리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능하신 손」이란, 「제련사의 불처럼 욥의 믿음을 정금으로 나오게 하는 시험 도구」입니다..







욥의 비관적인 기대와는 반대로 그 일은 정확히 일어났습니다.. 일단 하나님께서 그를 낮추시자 욥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욥기 42장 3,5,6절>을 보십시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전에는 보지 못했던 당신의 모습을 이제 봅니다.. 저의 이해력이 너무나 제한적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당신을 무조건 믿을 수 있음을 압니다..>







우리는 「욥이 치렀던 싸움」을 똑같이 겪지 않고도 그와 동일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롬 15:4절)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삶에 임하는 하나님의 능하신 손을, 결코 우리의 빰을 때리는 하나님의 매운 손으로 보지 말고, 소망을 위한 근원으로 보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인 우리를 향해, 오직 선한 의도만을 가지고 계심을 깨닫고, 현재의 상황을 통해 좋은 결과들을 보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러한 태도를 가질 때 염려는 지속될 만한 힘을 잃습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 낮출 때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절) 고 사도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여기서 때가 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때이지 우리의 때가 아닙니다..




그 때는 언제 옵니까? 하나님께서 그 분의 목적을 이루실 때입니다.. 지금은 그 때가 조금은 모호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염려에 대한 변명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온전한 때를 가지고 계십니다..」

실제로 우리의 구원은 그분의 온전한 때에 달려 있습니다.. 영원한 삶에 대한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그분의 때에 있다고 사도 바울은 구체적으로 말했습니다(딛 1:2,3절)..







「하나님의 때를 신뢰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있어서 결코 가볍거나 피상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적절한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높이실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현재 어려움으로부터 우리를 들어올림을 말하는 헬라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아무리 최악의 시련일지라도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잠시 지나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 점을 기억하십시오.. 끝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해서 끝이 없다고 결론짓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잠시라도 그것을 믿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들어 올리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는 약속된 구원의 때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처신해야 합니까?




사도 베드로는 "겸손하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6,7절) 고 말했습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미가서 6장 8절>을 보십시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겸손입니다..


3. 하나님의 돌보심에 대한 믿음..

「겸손하기 위해서는 돌보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필요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신뢰하는 태도를 가지라고 말했습니다.. 신뢰의 기초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반복적으로 보여주신 사랑의 돌보심에 있습니다..







<주님, 제가 곤란에 처했습니다.. 이 시련을 어떻게 헤쳐나갈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저를 돌보신다는 것을 알기에 모든 것을 주님께 넘겨드립니다..>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염려를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맡긴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말 위에 얹는 담요처럼」 어떤 물건 위에 다른 무언가를 걸치는 것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눅 19:35절)..







우리의 모든 염려, 앞으로 겪게 될 모든 불만족, 낙담, 절망, 회의, 고통, 고난을 들어서 하나님께 던지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 위해 그것을 대가로 내놓으십시오.. 하나님은 실제로 우리를 돌보아 주십니다..







한나가 바로 그런 일을 했습니다.. 그녀에게는 자식이 없었는데 그것은 고대 유대인 여성에게는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한나가 그 문제 앞에서 어떻게 했는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1장 10-18절>을 보십시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하니, 한나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분됨이 많기 때문이니이다 하는지라. 엘리가 대답하여 이르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







한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왜 한나는 더 이상 슬퍼하지 않았습니까?




상황은 달라진게 없었지만 「주님께 근심을 던졌을 때」 그녀는 변화되었습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은 그녀에게 아들 사무엘을 주시는 은혜를 베푸셨고, 그 아이는 자라서 하나님의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그녀에게 다른 세 아들과 두 딸을 주셨습니다.. 한나 자체가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많으신 관심에 우리의 모든 염려들을 맡기며 그분의 능하신 손 아래에 몸을 낮출 때 하나님께서 적당한 때에 우리를 높이실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첫 번째 서신을 쓰면서, <시편 55편 22절>을 마음에 두었음이 틀림없습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그것은 장차 우리가 동요를 느낄 일이 전혀 없으리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제사장에게 술에 취했다는 비난을 들을 때 한나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따금씩 우리가 감당하기에 너무나 크게 보이는 짐을 지고 있을 때 사람들은 우리를 무신경하게 다루고 오히려 더 많은 짐을 지웁니다..




그러나 한나와 같이 우리는 그것에 대해 감사하고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가운데 위로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로  우리에게 마음을 쓰고 계시는지 수시로 상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예수님께서 산상 설교에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들의 백합화에 지나지 않은 것도 화려하게 입히시는 분께서 우리를 왜 안 입혀 주시겠습니까? 새들도 신실하게 먹이시는 분께서 우리를 왜 안 먹이시겠습니까?


영적인 성숙함은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가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는가는 그의 기초가 얼마나 튼튼한가에서 결정됩니다..)




그것은 「겸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 「다른 사람들을 향한 겸손」입니다..




그리고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에 대한 믿음」입니다..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걱정하지 않으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그냥 하나님께 진심으로 말씀드리십시오..




<주님.. 두려움이나 걱정과 한판 승부를 벌여야 한다면 물론 그 싸움을 받아 들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바로 주님의 손에 넘겨 드리겠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7절>을 다시 보십시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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