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 축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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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5일 주일 설교 - 웃게 하시는 하나님 (창 21:1-8절)(6절)
 이기남    | 2020·07·04 10:27 | HIT : 89 | VOTE : 0

* 설교 - 웃게 하시는 하나님 (창 21:1-8절)(6절)







하나님은 우리를 웃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이 그토록 오랫동안 갈망하고 소원했던 이삭이 마침내 태어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기뻐서 웃은 것처럼,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망, 갈망, 사모하는 것들>을 마침내 이루어 주심으로써 우리를 웃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 이삭이 어떻게 태어났습니까? 아브라함과 사라의 각별한 노력에 의해 태어났습니까? 아닙니다..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보살펴 주셨고, 찾아 오셨고), 말씀(약속)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습니다..




<2절>에 보면, 사라는 임신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그 예정된 때에) 노년의 아브라함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예정 된 때에> 아브라함의 가정에 이삭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은혜로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하시고,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되, 그 예정 된 때에 지키십니다..




그때를 아브라함과 사라는 알 수 없었습니다.. 이삭을 낳기 불과 1년 전에야 그들은 그때를 알 수 있었습니다..




약속은 받았지만, 때를 알 수 없으니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믿고 기다리는 일 뿐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 여정을 보면 믿고 기다리는 과정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약속을 하고 약속된 시간에 나갔는데, 그 사람이 아직 오지 않고 늦게 나왔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물론 대상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단 열을 받습니다.. 좀 더 엄격한 사람은 그 사람과는 다시는 안 만나겠다고 마음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만 하시고 기한은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냥 기다리기만 하면 됐는데,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 나름대로 마음 속에 시한을 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정한 시한에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았을 때, 그는 실망했고 조급해 졌습니다..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조금이라도 힘이 더 남아 있을 때, 자기 힘으로 후사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이스마엘을 낳았고,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잘 살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하나님의 방식도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제 삼자의 입장에서, 이 성경을 읽을 때, <아브라함이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조금만 더 참았어야 했는데> 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사자가 되었을 때에는, 현실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경험합니다..








우리가 정한 시간 내에 <우리가 간절히 갈망하던 일, 소원했던 일, 사모했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우리의 생각은 쉽게 아브라함처럼 돌아갑니다..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지 않으니 내 힘으로 해야겠다..>







그렇게해서 이스마엘을 생산해 냅니다.. 그리고는 이스마엘을 이삭으로 둔갑시켜 자족하며 살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이스마엘이지 결코 이삭이 될 수 없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예정된 때에>, <사라를 통해>, <늙은 아브라함에게> 낳아준 아들 이어야만 합니다..







이스마엘의 탄생은 아브라함의 가정에 불화를 불러 왔지만, 이삭의 탄생은 아브라함의 가정에 진정한 웃음을 주었습니다..







이삭을 낳은 사라가 말합니다.. <창세기 21장 6,7절>을 보십시오..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또 이르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아브라함의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진정한 승리자라는 말처럼, 사라는 마지막에 웃는 진정한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사라의 지난 인생은 웃을 수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사라의 웃음은 쓴웃음, 비웃음 뿐이었습니다..




이방 신을 섬기는 이웃의 가나안 여인들이 아이를 쑥쑥 낳는 것을 볼 때마다 쓴웃음만 나왔습니다.. 여종 하갈이 이스마엘을 낳고 자신을 무시할 때는 피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사라에게 지난 날의 슬픔과 아픔은 다 사라지고 잊혀졌습니다..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서 웃음이 샘물처럼 흘러 나왔습니다..




아이를 보면서도 웃고, 밥을 지으면서도 웃고, 설거지를 하면서도 웃고, 여인들과 대화를 하면서도 웃었습니다..







사라의 웃음이 우리에게는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웃음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기다리는 과정은 어렵지만, 그 결과는 반드시 웃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가능한 차선」이 아니라, 「불가능해 보이지만 약속있는 최선」을 선택하여, 마침내 웃는 자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으셨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약속을 받으셨습니까?




믿고 기다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사라처럼 우리도 마지막에 진정한 웃음을 웃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꼭 마지막에만 웃어야 합니까?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삭이 반드시 태어날 것을 확신했다면, 그 과정 속에서도 웃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웃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히 이루어 짐을 믿고, 하나님께서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지금 이 시간에도 웃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웃음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웃게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도 웃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두신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웃을 뿐만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는 가족과 친척과 이웃들이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 때문에 웃게 하려고> 우리를 이 땅에 두신 것입니다.. 축제교회..







그런데 우리가 신앙 안에 있으면서도 웃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웃을 일이 있어야 웃지요..> 요즈음 같아서는 이 말도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웃게 하시는데, 내가 마음껏 웃을 수 없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 집에, 며느리가 드디어 임신을 했습니다.. 결혼한지 꾀 오랜 시간이 흘러서 이뤄진 임신이라 엄청 기뻣습니다.. 하나님께서 웃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잠시는 웃었지만, 계속 웃을 수는 없었습니다..







왜 계속 웃지 못합니까? 웃지 못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먼저는, 태어난 아이가 겪게 될 이 땅의 현실을 생각하면 웃을 수가 없습니다.. 또, 제 주변에는 아직도 자녀를 갖지 못해서 힘들어 하는 가정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마음껏 웃을 수 있겠습니까?







자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 보니, 웃을 일이 별로 없게 됩니다.. 잘 되도 걱정, 안되면 더 걱정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6절>에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셨다"는 사라의 고백을 보면, 「하나님은 나를 웃게 하시는 분」인데, <내가 마음껏 웃지 못했구나>를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우리가 누군가를 빵 터지도록 웃게 하려면, 일을 꾸며야 합니다.. 그런데 일을 잘 꾸몄는데도, 그 사람이 빵 터지지 않고 코 아래만 웃는다면, 웃게 하고자 하는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허탈감을 느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웃음을 주시고자 하시는데, 우리가 웃지 않는다면 많이 서운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웃을 일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웃을 일이 없어집니다.. 상황과, 형편과, 조건이 어려운데 어떻게 웃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분명 우리를 웃게 하시는데, 우리가 그 웃을 일을 찾지 못해서 웃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웃게 하실 때, 마음껏 웃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웃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려 있다면 우리는 웃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면서 많이 웃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성경공부 - 예배 - 헌신)




또, <하나님이 하신 일>을 전하는 우리를 통해 듣는 사람들도 같이 웃는 은혜가 넘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전도)







이삭이 아브라함의 가정에 웃음을 주었다면,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가정에 깊은 근심을 주었습니다..




이삭이 자라나 젖 뗄 때가 되었고, 아브라함은 그 날을 기념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8절)..







고대 시대에는 만 3세가 넘도록 젖을 먹였고, 유아 사망률이 높던 때였기 때문에 그때까지 아이가 살아 있다는 것은 큰 복으로 여겨져서 잔치를 베푸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이삭은 건강하게 자라나 젖 뗄 때가 되었고, 이스마엘은 17,18세의 청년이 되었습니다..




이삭의 탄생과 함께 이스마엘의 장자권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스마엘은 그런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을 은밀하게 학대했는데, 그것이 사라에게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9절>에서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고 있었다는 말은, 단순히 아이들끼리에 있을 법한 놀림이 아니라, 하갈이 임신 한 후에 사라를 무시하며 자신이 여주인이 되고자 했던 것처럼, 이스마엘이 자신의 장자권을 주장하며 이삭을 학대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니 이 사건은 매우 심각한 일이었습니다.. 사라는 이 심각성을 아브라함에게 알렸고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 내는 길 밖에 없다고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일로 인해 매우 괴로워했습니다(11절).. 이스마엘도 자기 아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과 이스마엘이 공존하며 살 수 있는 길은 없을까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스마엘을 집에 두기 위해서는 그를 장자로 세워야 하고, 그렇게 되면 이삭은 그의 종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마엘도 아들인데, 차마 아들을 쫓아 낼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이 쫓겨나서 제대로 살아갈 수는 있을까 심히 걱정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12,13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큰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하갈과 이스마엘의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난 아브라함은 먹을 것과 물을 가득 채운 가죽 부대를 준비해서 하갈에게 준 후 그들을 집에서 내쫓았습니다(14절)..







하갈과 이스마엘은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브엘세바 광야를 헤매고 다녔습니다.. 어느덧 먹을 것, 마실 물이 다 떨어졌습니다..







하갈은 기진맥진해 버린 이스마엘을 어떤 작은 나무 아래 눕혀두고, <화살 한 바탕 거리>(활의 사정거리만큼 떨어진 곳, 250-300m)로 가서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16절) 고 말하며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하갈은 죽어가는 아들을 보며 절망했습니다.. <활의 사정거리만큼 떨어진 곳>(쉬운 성경)에서 나무 그늘에 눕혀진 아들의 모습은 점처럼 보였습니다..







그 거리는 아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볼 수 없는 거리였을 뿐만 아니라, 하갈의 통곡 소리를 아들이 들을 수 없는 거리였습니다..




그 거리는 하갈이 아들의 생명을 제대로 지켜낼 수 없다고 여기고 그 고통을 차마 마주할 수 없는 지경에서 좌절하여 주저앉아 있는 지점입니다..







그 지점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아이의 미래에 대한 소망을 말씀을 주시고, 하갈의 눈을 밝게 하셔서 우물을 발견하게 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여 절망하며 통곡하던 그 자리가 새 출발 할 수 있는 소망의 자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이가 자라는 동안 그 아이와 함께 하셨습니다(20절).. 이스마엘은 죽음의 땅과 같았던 광야에서 살았고, 훌륭한 활잡이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생명을 위협하던 광야가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그들을 위한 생명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어머니 하갈이 눈물을 흘리면서 죽음을 기다렸던 <활의 사정 거리>(화살 한 바탕의 거리)가 이제는 이스마엘의 자라남을 증명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 거리가 멀어질수록 이스마엘을 죽음과 떼어 놓은 안전거리가 되었고, 그 거리가 멀어질수록 이스마엘의 기량이 뛰어남을 보여주는 기쁨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이 광야에서 나라를 이루며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낳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 가정의 근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근심거리를 쫓아내었을 때 하나님은 그도 책임져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키우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친히 그를 키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실수와 허물까지 다 감당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웃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일찍이 이 하나님을 알았던 다윗은 <시편 30편>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쉬운 성경) “주님께서 내 슬픔을 바꾸시어 춤이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내 슬픔의 옷을 벗기시고, 기쁨의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이제 내가 가만히 있지 않고, 주님을 노래하겠습니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님을 언제까지나 찬양하겠습니다.”







우리도 이제 가만히 있지 않고 주님을 향해 기쁨의 노래를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웃을 일 없는 세상에서 우리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영광과 찬송을 올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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