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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26일 주일 설교 - 전복(顚覆) (눅 6:20-26절)(20절)
 이기남    | 2020·07·25 11:13 | HIT : 126 | VOTE : 0
* 설교 - 전복(顚覆) (눅 6:20-26절)(20절)







1. 에누리하여 사들인 기독교..






쇠얀 키에르케고르의 책 『공포와 전율』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누가복음 14장 26절에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의무에 관해 주목할 만한 가르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이것은 가혹한 말입니다.. 누가 감히 이 말을 견디고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또 이런 말은 흔히는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침묵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도피에 불과합니다..







그렇지만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이 말이 신약 성서에 나와 있는 것을 알고 있고, 그는 어떤 주석서에서는 여기 혹은 다른 몇 곳에 나오는 그리스어 '미워한다'는 뜻의 말이, 점점 그 뜻이 약화되어 '덜 사랑한다', '업신여기다', '염두에 두지 않는다', '무시한다' 라는 뜻이라고 설명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이 말이 나오는 앞 뒤의 관계는 그런 구미에 맞는 설명을 결코 지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즉, 곧이어 계속되는 절(節)에는, 망루를 세우려고 하는 사람은 후에 가서 남의 비웃음을 사지 않도록 그것을 완성할만한 비용이 자기에게 있는지를 먼저 계산해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과 앞서 인용한 절과의 밀접한 연관은, 이 말이 그 건물을 세울 수 있는지 없는지를 각자가 스스로 자기를 검토해야 한다는 식의, 가능한 한 무서운 뜻으로 해석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렇듯이 <에누리하여 사들인 기독교>를 이 세상에 밀수입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저 경건하고 해박한 주석가(註釋家)가, 문법적으로나 어학적으로나 또 유비적(類比的)으로나, 그것이 그 구절의 뜻이라고 사람들을 확신 시키는 일에 성공한다면, 그는 아마도 같은 순간에 기독교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것이라는 사실을 바로 같은 그 사람에게 믿게 하는 일에도 성공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에누리하여 사들인 기독교의 가련한 모습>을, 안타깝게도 너무나 쉽게 보고 있습니다..







2. 잊혀진 제자도..




달라스 윌라드(Dullas Willard)는 그의 책 『잊혀진 제자도』(The Great Omission)에서 토저(A.W.Tozar)가 안타까운 심정으로 토로한 이야기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복음주의 기독교 진영 전반에 확연한 이단이 생겨났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그저 구세주가 필요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자진하여 영접할 수는 있으나, 그분을 주님으로 삼아 순종하는 일은 우리가 원할 때까지 미룰 권리가 있다>는 개념입니다..」







그리고 토저(A.W.Tozar)는 덧붙였습니다..




「<성경은 순종 없는 구원을 모릅니다..> '벰파이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도 제법 타당한 일이라는 인상이 그 이단에서 생겨났습니다..




사실상 그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디 당신의 피가 조금 필요합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의 학생이 되거나, 당신의 성품을 닮을 마음은 없습니다.. 솔직히, 제가 인생을 즐기는 동안 좀 못 본척 해 주시렵니까? 천국에서 뵙겠습니다..>







그러나 이 방법을 예수님께서 용인하실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있습니까? 멈춰서 곰곰히 생각해 보면, <죄 사함 이외의 많은 것들에서 하나님을 믿지 못하면서, 유독 죄 사함만 믿는다는 것>이 실제로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







예수님을 <구주>로는 영접했지만, <주님>으로는 모시지 않으므로, 그리스도인들 안에 「제자도」가 잊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벰파이어 그리스도인」이라는 형태의 <이즈러진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요지부동으로 교회 안에 자리 잡고는 점점 세를 불려 나가고 있습니다..







3. 전복된 삶..




오늘 본문 「누가복음 6장 20-26절」은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8복」과는 다르게, 「4복과 4화」를 대칭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한 <이중적인 표현>을 통해서 메시지의 내용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6장 20-49절>까지 이어지는 「제자의 내면성」에 대한 긴 메시지 안에서, 오늘 주신 본문 <20-26절>은 「제자도의 핵심」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좇고, 헌신하기를 원한다면, 이 「제자도의 핵심」을 결코 놓쳐서는 안됩니다..







오늘 주신 본문의 「4복과 4화」는 한마디로, 「주님을 좇는 제자는 달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제자도의 핵심」입니다.. 좀 더 나아져야 한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전복」입니다..



「전복(顚覆)」이란 「뒤집혀 엎어짐」(turn over) 이라는 뜻입니다.. 참으로 제자답다는 것은, 한마디로 「전복되는 것」입니다..







<제자>는 <어떤 면에서 전복되어야 합니까?>







(1) 첫째, 「가치관」이 전복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다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치관」은 「세상을 보는 안경」과 같습니다..




「가치관」은 「무엇이 옳고 그런지, 무엇이 귀하고 천한지, 무엇이 좋고 싫은지를 평가하는 기준」이 됩니다.. 우리에게는 행복과 불행을 보는 「가치관」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는게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돈 좀 있고, 배부르고, 즐겁고,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 했습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족해 졌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사는게 너무 힘들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렇게 좀 되었으면 얼마나 좋고 행복할까.." 라고 합니다..







주님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보통 사람들의 소박한 행복관」을 「전복」시키십니다..




「진짜 복받은 사람」은 오히려 가난하고, 배고프고, 울고, 핍박받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성경의 다른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복 주셔서 부자가 되었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주님은 <가난 자체>가 복이고, <부요한 것 자체>가 화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가난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결정적인 것은 「가난하면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가난은 「실제적인 가난」을 말합니다..







가진 것도 없고, 내놓을 것도 없고, 할 수 있는 것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 주십시오..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







린 페인의 책 『듣는 기도』에서 C.S. 루이스는 「모든 기도에 선행되는 기도」는 "말하는 이가 진정한 나 자신이게 하시고, 내가 말씀 드리는 대상이 참 당신이게 하소서"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진심으로 도와 달라고 부르짖은 때>가 언제 였습니까?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하는 것..」 이것이 「다른 사람들과 제자를 구분 짓는 결정적인 기준」이 됩니다..







「아무 것도 없어서 도와달라고 매달렸더니, 하나님께서 어느새 나를 장악해 버리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장악하시는 그 상태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재물도 많고, 먹을 것도 많아서 이제 가질 것 다 가졌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만족해하면, 여기 더 귀한 것이 들어갈 틈이 없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이것이 「화」라는 것입니다..







<시편 51편 17절>의 <다윗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여기서 「복과 화를 가르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현재 처한 상황은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이 계시느냐 안 계시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일하는 사람」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와 함께 일할 틈이 없는 사람」은 <화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필요를 놓치지 않는 사람」(하나님이 필요한 사람)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필요를 놓치는 사람」(하나님이 필요 없는 사람)은 <화있는 사람>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성전을 지어 드리겠다고 했을 때(삼하 7:1-18절)의 상황들을 잘 묵상해 보십시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상황의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변화」입니다.. <하나님이 필요하냐>는 것입니다..







「행복관」이 「전복」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라는 절규가 매일 터져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2) 둘째, 「태도」가 전복되어야 합니다..




「가치관」이 「전복」되면, 「태도」도 「전복」됩니다..







가난하고, 배고프고, 슬프고, 미움 받을 때, 우리가 보이는 <일반적인 태도>는 무엇입니까?




지긋지긋하고, 속이 좁아지고, 화가 나고, 자존심 상하고, 복수하고 싶고, 자신이 너무 초라해 보입니다..







그러나 「제자」는 신비하게도 「태도의 전복」을 경험합니다..




가난해도 넉넉합니다.. 배고파도 든든합니다.. 울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안이 있습니다.. 핍박 받으면서도 기뻐합니다..







달라도 완전히 다른 태도입니다.. 이것은 <허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이 경험하는 실제>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여전히 「변두리 인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핵심 인생」으로서의 당당함과 여유를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먼저 신앙 생활을 했던 <선배들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시편 23편> 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




<시편 40절 17절>을 보십시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건지시는 자시라 ......"







찬송가를 보십시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







<형편>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보다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있는 사람>은 그 어떤 형편에서도 <당당한 사람>인 것입니다..







「제자는 이렇게 <태도의 전복>을 경험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아무리 연약한 사람>도, <잘못을 많이 저지른 사람>도 들어갈 틈이 있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쉼과 회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의 매력」입니다..







이런 <매력>이 회복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이런 <매력>에 이끌려 사람들이 주님께로 나아 오는 역사가 일어 나기를 기도합니다..







(3) 셋째, 「운명」이 전복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 나라>는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날에」 예수님이 다시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는 완성될 것입니다..







「그날에」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 중에 주목할 만한 한 가지 일이 있습니다.. 바로 「운명의 전복」입니다..




「변두리 인생」이 「핵심 인생」으로 뒤바뀔 것입니다.. 반면에 많은 「핵심 인생」들은 낭패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역전 드라마>가 펼쳐질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이런 「운명의 전복」을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1장>의 「마리아의 노래」(46-55절)를 들어 보십시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46-48절)







<16장>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도 「운명의 전복」을 이야기 해 줍니다..







사람은 이렇게 끝까지 가봐야 다 알게 됩니다..




우리의 은밀한 것을 보시고, 우리의 끝을 아시는 「주님의 평가」만이 최종적이고 권위있는 평가가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나 자신에 대해 미리 속단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결국은 <부요하고, 배부르고, 웃고, 칭찬받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4. 서머나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




<요한계시록 2,3장>에는, 우리 주님께서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서머나 교회」(2:8-11절)는 칭찬만 받은 교회입니다..




편지에 책망과 경고가 나와 있지 않은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와.. 무슨 대단한 면을 가지고 있기에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안듣는 교회가 되었단 말인가?> 하는 기대를 가지고 보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서머나 교회」의 외적인 모습에서는 그 비결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서머나 교회」는 외적으로는 참으로 초라한 교회입니다..




환난과 궁핍이 있었던 교회(9절)요, 어려움과 가난이 끊이지 않았던 교회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사람들에게 별 매력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오늘날과 같이 큰 건물을 가지고, 유명 인사들이 드나드는 대형 교회를 선호하는 현실가운데서는 <누구 하나 관심을 갖지 않을 그런 교회>입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에는, 사람들은 관심을 갖고 있지 않지만,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할 <심령의 가난함>」이 있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아무런 미래도 소망도 없어 보이는 교회였지만, 그러나 주님은 이 교회를 향해 "너희는 부요한 자들이다"(9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외적으로 부요한 교회가 참 교회가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눅 6:20-26절) 교회」, 그래서 「주님만을 의지하는 교회」가 「칭찬 받는 교회」입니다..







(2) 「라오디게아 교회」(3:14-22절)는 칭찬은 없고 책망만 받은 교회입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자족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자족은 성경이 말하는 자족과는 달랐습니다..







그들의 자족은 「거짓된 것」이었습니다.. 「거짓된 자기 만족」이란 무슨 뜻입니까?




<물질적인 풍요를 곧 영적인 풍요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17절>을 보십시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 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부자였습니다.. 부요했습니다..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헌금이 차고 넘쳤고, 화려한 건물을 갖고 있었으며, 풍부한 인적 자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교회에 다니는 것에 만족했습니다.. 그들은 그것들이 곧 자신들의 영적 부요를 대변해 준다고 착각했습니다..




"나 라오디게아 교회 다녀" 라는 말이 자신들의 영적 신분을 보장해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생각, 곧 착각일 뿐이었습니다.. 주님이 바라보는 그들의 영적인 실상은 어떠합니까?




그들은 곤고하고 가난하고 가련한 존재들이었습니다.. 눈 먼 강아지와 같았고, 우화에 나오는 벌거벗은 임금님과 같이 벌거 벗었으나 자신만은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즉 그들의 영적 상태는 비참했습니다..







그들은 「개인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까봐 기도를 기피합니다..




주님과의 「만남에 대한 설레임」을 잊은지 오래였습니다..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주님께서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시키면 어떻게 하지?」 하는 불안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5. 되찾은 제자도..




「제자는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하는 사람입니다..」 「제자는 지금도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제자는 마지막 날 운명의 전복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이런 전복이 우리에게 일어나게 됩니까?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냥..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여 계속 주님을 좇아가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전복」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삶>이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살라고 가르쳐 주신 삶>입니다..







우리가 오늘도 삶의 현장에서, 「제자답게 살아야 할 궁극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4복 4화의 교훈」이 지금 이토록 절실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가 이렇게 <제자다워질 때>, 우리 하나님이 하나님답게 <우리를 통해 일하시고 영광을 받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4복 4화의 교훈」을 따라 <제자의 길>을 되찾고, 온전한 제자의 길을 기쁨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6. 헨리 마틴..




John MacArthur (존 맥아더) 목사님의 책 『Hard to Believe』(『값비싼 기독교』)에 보면, 선교사 헨리 마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선교사로 헨리 마틴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인도에서의 오랜 기간에 걸친 고난 많은 섬김의 삶을 산 뒤 그는 페르시아(오늘의 이란)로 가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신약 성경과 시편을 페르시아어로 번역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이미 노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인도에 머물러 있으면 더위 때문에 죽을지도 모르는데 페르시아는 인도보다 더 덥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페르시아로 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페르시아어를 배운 다음 9개월 만에 신약 성경 전체와 시편을 번역했습니다..







그 후 그는 페르시아 국왕의 재가를 받기 전에는 성경을 인쇄하거나 배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테헤란까지 960Km를 여행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는 왕을 만날 수 있도록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발길을 돌려 영국 대사를 찾기 위해 다시 640Km 를 여행했습니다..




대사는 그에게 소개장을 주며 다시 그를 640Km 떨어진 테헤란으로 돌려 보냈습니다..







이때가 1812년 이었습니다.. 마틴은 이 긴 여정 내내 노새를 타고 다녔습니다.. 밤에는 길을 떠나고 낮에는 겨우 삼베 한 조각으로 찌는 둣한 사막의 태양 빛을 피하며 휴식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테헤란으로 다시 돌아와 왕을 알현했고 페르시아에서 성경을 인쇄하고 배포할 수 있도록 왕의 승인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열흘 뒤 숨을 거두었습니다..







숨을 거두기 직전에 그는 일기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과수원에 앉아 감미로운 위로와 평안을 누리며 나의 하나님에 대해 생각했다.. 고독 속에서 나의 벗, 나의 친구, 나의 위로자이신 그분을 생각했다.."」







헨리 마틴의 삶은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사용하신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헨리 마틴의 영혼은 「진정한 제자도의 핵심」에 몰두해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일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8,3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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