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 축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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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 16일 목회자 주일 설교 -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의 자세 (요 3:22-36절)(30절)
 이기남    | 2021·05·15 22:15 | HIT : 394 | VOTE : 114
* 설교 -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의 자세 (요 3:22-36절)(30절)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윌리암 캐리(William Carey, 1761-1834년) 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20대에 영국에서 인도로 선교사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평생을 헌신했습니다..







그의 명성은 영국에서 드높아졌고 사람들은 <캐리, 캐리> 하면서 그에대해 아야기 했습니다..




수많은 후속 선교사들이 그를 이었습니다.. 역사가들은 그에게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윌리암 캐리 자신은, 임종을 앞두고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캐리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토록 해 주게나.. 다만 <캐리를 구원해 주신 분>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하도록 해 주게나.. 나는 오직 그리스도께서만 존귀히 되시기를 원하네..”」







몇 년 전, 자신이 개척하여 13년 4개월을 섬겼던 교회를 65세에 조기 은퇴를 하면서, 한 목사님은 <자신을 철저히 잊으라>고 교인들에게 신신당부했습니다..







「목사라는 한 개인에게 매인 신앙인이 되지 말고, 예수님과 연합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라」는 간곡한 메시지 였습니다..




그분의 고별 메시지는 교계는 물론 우리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캐리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캐리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되고, <철저히 잊으라> 했는데 잊지 못하는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분들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역자들이 다 윌리암 캐리처럼, 그리고 그 목사님처럼 행동한다면 우리가 굳이 이분들을 기억하며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례 요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예수님께로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을 기뻐했고, 그분이 흥하기 위해서 자신이 쇠하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구속 역사의 무대를 예수님께 넘기고 자발적으로 그 무대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기를 자청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위대한 자」라고 인정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잊지 않고 기억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의 자세」를 모범적으로 보여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 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편지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편지를 읽습니다..




우리가 굳이 그리스도를 말하지 않아도, 우리의 <존재 자체로>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그리스도를 읽고 전해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자세로 예수님을 전해야 할까요?




이 시간 세례 요한을 통해서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쉬운 성경) “신부의 주인은 신랑이다. 신랑을 기다리며, 그가 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신랑의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듣고 대단히 기뻐한다. 나의 기쁨도 이와 똑같은 것이다. 나의 기쁨이 이제 이루어졌다.”







세례 요한은 제자들에게 예수님과 자신의 관계를 비유로 말씀했습니다.. 비유로 말한 것은 제자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쉽도록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 비유 말씀의 앞부분을 읽어 보면, 세례 요한의 제자들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세례 요한은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베푼 첫 번째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이 세례를 주자 많은 유대인들이 그에게로 모여 들었습니다..







그런데, <2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 근처의 유대 지방에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시면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근처에서 세례를 베푸시자, 세례 요한은 살렘 근처에 있는 애논에서 세례를 주는 사역을 계속했습니다(23절)..







<애논>은 <샘들이 있는 곳>이란 뜻으로, 사마리아 근처의 요단 계곡에 있는 지명입니다..




<이는 그곳에 물이 많고, 사람들도 계속해서 자기에게 나아왔기 때문>이라고 <23절>(쉬운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세례 요한이 예루살렘 근처의 요단강 남쪽에서 <멀리 북쪽으로 이동해서> 거기서 세례를 베풀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유대 지역에서 세례를 베풀고 계셨기 때문에, <그분의 사역과 겹치지 않도록> 멀리 북쪽으로 이동해서 사역을 계속한 것으로 보입니다..







유대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지역을 떠나서, 유대인들이 접근하기를 꺼리는 사마리아 지역 근처로 간 것입니다..




그때는 아직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히기 전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세례 요한의 사역에서 절정을 이루던 때였습니다(24절)..







이 점이 세례 요한의 제자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때마침 요한의 제자들 중 몇 사람과 유대인 사이에 정결 예법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25절)..







이 논쟁의 내용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26절>을 볼 때, 이 논쟁이 유대교의 정결 예식에 대한 논쟁이라기보다는, 세례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 간의 효력에 대한 논쟁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즉, 세례 요한이 베푸는 세례가 더 효력이 있느냐, 예수님이 베푸는 세례가 더 효력이 있느냐 하는 논쟁이었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자기들의 선생님이 세례의 원조자이니까 그 세례의 효력이 더 크다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특정한 <유대인>은 세례 요한의 세례의 효력에 의문을 제기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논쟁 후에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와서 말하는 내용입니다.. <26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쉬운 성경) ”선생님, 요단 강 동편에서 선생님과 함께 계시던 분, 즉 선생님께서 이전에 증언하셨던 그분이 지금 세례를 주고 계시며, 모든 사람들이 그분에게로 가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말 속에 담긴 묘한 뉘앙스가 느껴지시나요?




그들은 예수님을 <요단 강 동편에서 선생님과 함께 계시던 분, 즉 선생님께서 이전에 증언하셨던 분>이라고 지칭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기들의 선생님과의 관계에서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선생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고, 자기들의 선생님의 증언을 받으셨던 분으로만 이해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지금 세례를 주기 시작했으며, 더욱더 놀라운 것은 모든 사람들이 그분에게로 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들>은 특별히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자기 선생님에게 세례 받으러 오는 사람들 중에 유대인들은 별로 없는데, 예수님께로 세례 받으러 가는 사람들 중에는 전부가 유대인들 입니다..







같은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일입니다.. 사람들을 다 빼앗기는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자기들의 선생님이 세례의 원조이신데, 후발 주자이신 예수님께 사람들을 다 뺏기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기 선생님의 경쟁 상대로 보았습니다.. 자기 선생님이 경쟁에서 뒤처지는 것 같아 조급한 마음도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잘 모르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입장이 한편으로 이해가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잘 몰랐기 때문에, 자기 선생님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우뚝 서기를 바랐습니다..




자기 선생님이 더 유명해지고, 자기들의 모임이 이름이 나고, 더 많은 유대인들이 자기 선생님께 몰려오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잘 모르는 교인들의 입장에서는, 자기 교회와 사역자의 이름이 유명해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내가 어느 교회 다닌다.. 우리 목사님은 누구다..> 이렇게 이름만 내세워도 만인이 알아주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자기 교회를 자랑하고, 자기 교회의 목사님을 자랑하는 교인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교회와 목사님이 <브랜드화> 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도할 때 이런 방법이 가장 쉽게 먹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 전해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모임과 사람만 전해진다면, 그리고 그것이 전부가 된다면, 그곳은 진정한 예수님의 몸 된 교회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제자들에게 단호하게 말씀합니다.. <27,28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쉬운 성경) 요한이 대답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주지 않으시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너희들은 내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며 그분보다 앞서 보냄을 받은 사람이다‘라고 말한 것을 들은 증인들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하시는 사역>이 자신의 사역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아서 하는 사역이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칩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한 것에 대해 다시 한번 확실하게 확인 시킵니다..







그리고 이 상황이 불편한 제자들과 달리, 자신은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를 제자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쉽도록 비유로 말씀합니다.. <29,30절>을 보십시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쉬운 성경) ”신부의 주인은 신랑이다. 신랑을 기다리며, 그가 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신랑의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듣고 대단히 기뻐한다. 나의 기쁨도 이와 똑같은 것이다. 나의 기쁨이 이제 이루어졌다. 그분은 점점 더 위대해질 것이고, 나는 점점 더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될 것이다.“








이 비유에서 신랑은 예수님, 신부는 예수님께 가고 있는 사람들, 신랑의 친구는 세례 요한 자신입니다..




신랑의 친구는 신랑의 들러리로서, 신랑의 결혼식을 위한 최선의 조력자입니다.. 결혼식의 환경이 유쾌하고 기쁨이 넘칠 수 있도록 조성하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신랑이 와서 신부를 맞아들이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기뻐합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며, 결혼식의 주인공은 신랑과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신랑이 등장하면 신랑의 친구는 그 모든 역할을 마치고 뒤로 물러나게 됩니다.. 뒤로 물러나서 신부와 연합하는 신랑을 보면서 대단히 기뻐합니다..







세례 요한은 <나의 기쁨도 이와 똑같은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세례를 주는 사역을 하는 것은 예수님께로 사람들을 인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마침내 그 일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고,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가는 모습을 보면서 세례 요한은 대단히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그분은 점점 더 위대하질 것이고, 자신은 점점 더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될 것이지만, 그것은 그에게 슬픈 일이 아니라 대단히 기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일을 무사히 마쳤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일,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긴 하지만, 신랑의 친구가 신부를 탐내어서 신랑과 대결 구도를 만든다거나, 신랑을 배신하여 신부를 취해서 달아나 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결혼식은 난장판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신랑의 친구가 아니라 도둑이요 강도일 뿐입니다..




우리는 결혼식장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너무나 끔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일의 현장에서, 어떤 사람이 양들의 우상이 되고, 교회를 사유화하는 일이 벌어지는 데 있어서는 별로 끔찍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개척자라는 이유로, 그 사람이 평생을 헌신했다는 이유로 신적인 존재로 떠받들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끔찍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일들로 인해 주님의 몸인 교회가 병들고, 주님의 편지가 세상 사람들에게 잘못 읽혀지곤 하는데도 말입니다..







이런 일은 너무나 슬프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들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알아야 합니다..




뭐와 같으냐면요, 결혼식장에서 신랑의 친구가 신부를 빼앗아 가는 일과 같은 끔찍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들을 경계해야 하고, 이런 일들을 방관하는 영적 지도자를 분별하여 단호히 배척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처럼 주님의 백성들이 주님과 연합하는 일을 지켜보며 기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물론, 신랑의 친구로서 그는 결혼식의 환경을 마련하는 데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우리가 목회자로서, 전도자로서, 혹은 예수님을 먼저 믿은 사람으로서, 한 영혼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데는 많은 수고를 해야 합니다.. 시간과 정성과 물질을 들여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 수고조차도 하나님께서 주셔서 하게 된 수고입니다.. 그 수고의 대가를 우리는 <신랑 친구의 기쁨으로> 받게 됩니다.. 수고를 많이 한 사람일수록 그 기쁨은 더욱 클 것입니다..







내가 수고하여 인도한 사람이 예수님과 연합하여 생명을 얻고, 새로운 삶, 기쁘고 행복한 삶, 영원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며, 인생의 중요한 방향과 결정의 시기에 주님과 의논하며 선택하고, 고난과 어려움을 당할 때 기도하며 믿음으로 헤쳐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수고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기쁨을 함께 누리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은 어떻게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으로서의 올바른 자세를 가질 수 있었을까요?




그가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이 이해한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예수님은 <위로부터 오신 분이요, 모든 것 위에 계신 분>이십니다(31절).. 그래서 예수님 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참되게 전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땅으로부터 온 사람은 땅에 속하여 땅의 일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가 아무리 뛰어난 지혜와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의 지혜와 능력은 땅의 한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에 예외적인 사람들이 구약 시대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성령님을 받아서 하늘의 일을 보고 들었던 구약의 선지자들입니다..







그들은 땅에 속한 사람들이었지만, 하늘의 일들을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예수님에 비하면 한계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성령님을 한없이 주시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 제한적인 예언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께 성령님을 한없이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오직 아들을 통해서만 자신을 완전하게 계시하시고 드러내 보이셨다」는 의미입니다..




오직 위로부터 오신 아들만이 하나님을 완전하게 드러내어 보이신 분이시며, 그분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분만이 하나님의 말씀 자체이시며, 하나님의 헤세드와 에메트가 충만하신 분이시며,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영광이시며,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본성을 그대로 보여주신 분이십니다(히 1:3절)..







하나님은 이 아들을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그의 손에 맡기셨습니다(35절)..




그야 말로 <모든 것>을 맡기셨습니다.. 천지 만물뿐만 아니라 인간의 구원과 심판까지도 맡기셨습니다.. <36절>을 보십시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생명> 곧 <영생>은 아들 「안에」 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아들과 연합하여, 마치 신부가 신랑과 연합하듯이, 아들의 생명을 소유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을 아들의 생명에서 떨어지게 합니다.. 그 상태가 곧 하나님의 진노가 있는 상태입니다..







믿는 것과 영생, 믿지 않는 것과 진노는 현재적이며 동시에 미래적입니다..




영생이 현재적인 동시에 미래적인 것처럼, 진노 또한 현재적이며 동시에 미래적입니다..







믿는 사람은 미래에 영생을 누릴 것이지만, 그 영생을 현재도 누립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미래에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것이지만, 현재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안다면, 그 누구도, 그 어떤 사역자도 자신으로 예수님을 대체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지혜는 하늘에서 온 것이지만, 자신의 지혜는 땅에 속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늘에서 보고 들은 것이지만, 자신의 말은 땅에 속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은 영생이지만, 자신은 결코 영생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는 구원과 심판의 권세가 있지만, 자신에게는 아무런 권세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자신으로 예수님을 대체하려고 하겠습니까? 어떻게 해서라도 양떼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영혼을 자신이 책임지려 하겠습니까? 어떻게 해서라도 영혼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땅으로부터 온 사람들이고, 땅에 속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위대한 일을 한다 해도 땅의 일을 할 뿐입니다.. 하늘의 일을 하실 분은 오직 하늘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뿐이십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동참할 뿐입니다..




그 자체가 우리에게 큰 영광이고, 대단한 기쁨입니다.. 이 영광과 기쁨을 맛보며 살아 가시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오늘 주신 말씀에 따라 그에 합당한 목회자로 살아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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