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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13일 주일 설교 - 질투에 대하여 (삼상 18:6-16절)(9절)
 이기남    | 2021·06·12 09:54 | HIT : 143 | VOTE : 0
* 설교 - 질투에 대하여 (삼상 18:6-16절)(9절)


초대 교부들이나 중세의 영적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7가지 큰 죄>는 중요한 설교의 주제요 날마다의 삶에서 싸워 이겨야 할 생생한 일과이기도 하였습니다..







7가지 죄악, 즉 <교만, 질투, 분노, 탐심, 탐식, 게으름, 정욕>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감정을 동반하는 죄악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질투」의 죄악입니다..


질투에는 굉장한 감정적 에너지가 집중됩니다..




질투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자꾸만 생각하게 되고, 또 그 사람을 생각하는 순간, 질투라는 감정의 깊은 늪 속에 빠지게 됩니다..


「유태인의 민담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천사가 한 여자에게 나타납니다.. "내가 너를 축복하겠다.. 그리고 네가 원하는 친구 한 사람에게는 너에게 주는 복보다 갑절 더 많은 복을 주겠다.. 그런 친구가 있느냐?" 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이 여자는 갑자기 자기가 질투하고 있는 한 친구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천사님, 저에게 주실 복을 갑절이나 더 줄 사람이 있습니다.." 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합니다..


천사가 "그럼 너에게는 어떤 복을 주기 바라느냐?" 고 했더니, 이 여자는 "제 눈을 하나만 멀게 해 주십시오.." 라고 하더랍니다..」


이 여자의 눈을 하나 멀게 하면, 이 여자가 질투하는 친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국, 자신의 눈 한쪽을 잃게 해서라도 질투하는 친구의 두 눈을 다 멀게 해달라는 말이 됩니다..






이처럼 질투한다는 것은 얼마나 강력한 감정이며 얼마나 강력한 느낌이 농축된 죄악인지 모릅니다..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다윗이 블레셋의 적장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개선 장군이 되어서 돌아옵니다..




그리고 이 개선의 퍼레이드에 여자들이 나와서 환영을 합니다.. 그런데 이런 노래를 부르며 환영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7절)


이것이 문제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비극의 시작입니다..




지금 그들의 임금은 사울인데,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라고 하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이 말은 다윗이 앞으로 왕의 보좌를 노리지 않겠느냐는 뜻입니다..




이때부터 사울의 인생이 변합니다.. 다윗을 질투해서 눈이 먼 것 같은 질곡의 긴 역사가 시작됩니다..




1. 질투란 어떤 죄입니까?






(1) 첫째, 질투란 인간이 가진 가능성을 제한시켜버리는 죄악입니다..

일단 질투에 사로잡히게 되면 더 이상 자신의 장점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장정을 계발하지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본래 사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가 왕으로 부르심을 받는 과정을 보면 본래는 아주 괜찮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9장 2절>을 보십시오..  

"기스에게 아들이 있으니 그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


사울은 「미남」이었고 또 키도 컸습니다.. 다른 사람은 그의 어깨 밖에 오지 않을 정도로 「키가 훤칠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사무엘상 9장>을 읽어보면, 이 사울의 아버지가 암나귀를 잃어버린 사건이 나옵니다..




그래서 사울이 나가서 잃어버린 그 나귀를 찾는데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책임있게 찾습니다..







그렇게 찾아 다니다가 하나님의 사람을 만납니다.. 선견자로 불리는 이 선지자를 만나서 사울은 그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보면 사울은 아주 「예의가 바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을 존중히 여깁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존중히 여기는 태도에서 우리는 사울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신앙의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무엘상 9장 21절>에 보면, 사무엘이 사울을 이 나라의 왕으로 세우겠다는 뜻을 보였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자신이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라고 말합니다..


사울은 자신은 왕이 될 자격이 없다고 아주 「겸손하게 자기를 표현할 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왕이 되어서 1년에도 몇 번씩이나 전쟁을 치르게 되자 그 전쟁에서 뛰어난 지략과 용맹성을 발휘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지혜롭고 용감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만하면 얼마나 괜찮은 사람입니까?


그런데 이러한 사울이 다윗을 질투하기 시작하자 그때부터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이상한 사람으로 변질되어 갑니다..


역사 속에서 아주 귀한 일을 할 수 있었던 지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생이 쇠락해 갑니다.. 질투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질투 때문에 자신의 가능성과 장점을 미처 다 발휘하지 못하고 일생을 비극적으로 끝낸 것입니다..


「이러한 스토리의 영화가 한 편 있습니다.. 아카데미상 8개 부분을 수상했던 <아마데우스>라는 작품입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궁중 악사였던 안토니오 살리에리는 참 훌륭한 음악가였습니다..




사람들의 존경과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었던 대단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었으며 신앙심도 깊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신기(神技)의 재주를 가지고 있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를 만나게 됩니다..




순간 그의 마음 속에 강한 질투의 감정이 솟아 올랐고 그때부터 그의 인생은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그가 모차르트를 질투하지만 않았더라도 사람들에게 여전히 존경받고 인기를 누리는 음악사에 귀한 업적을 남기는 아름다운 인생을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질투가 이 사람을 망쳤습니다..


이처럼 질투는 우리가 가진 가능성, 그 선한 가능성을 제한시키는 죄악입니다..


(2) 둘째, 질투는 인간의 일상적인 삶을 다 빼앗아 버리는 죄악입니다..

질투는 아주 강력한 감정입니다.. 질투하는 대상에 자신의 모든 에너지가 다 집중됩니다..




그리고 주야로 질투하는 대상이 되는 사람만 생각납니다.. 주야로 그 사람만 묵상합니다.. 밤에 자다가도 깨서 생각날 정도입니다..


질투가 가져오는 시기, 미움, 증오의 감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맙니다.. 그러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 삶이 마비됩니다..

그 전형적인 모델이 바로 이 사울 왕입니다.. 본문 <9절>을 보십시오..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그런데 여기에는 우리 한글 성경에는 빠져 있는 아주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원문대로 표현하자면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질투하는 눈으로 주목하였더라" 고 해야 더 맞습니다..






NIV 성경에 보면 "And from that time on Saul kept a jealous eye on David." 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질투하는 눈으로 주목했다"는 것입니다.. <질투하는 눈>이라는 단어가 강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쉬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울은 그 날부터 다윗을 경계하는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질투했습니다."


사울은 또 다윗을 질투하는 눈으로 한 번 바라보고 지나간 것이 아니라, 그 날 이후로 계속 주목해서 보았습니다..




계속해서 사울은 <저 다윗을 어떻게 처치할까?> 하는 생각만 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그 후 「사울의 남은 생애는 오로지 다윗에 대한 질투의 생애」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질투가 지배하는 생애, 그것이 사울 왕의 인생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니 왕의 직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었겠습니까?


<사무엘상 24장>을 보면, 이스라엘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전투가 다소 소강 상태에 들어갔을 때, 그때 어떤 사람이 사울 왕에게 이런 보고를 합니다..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쫓다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더이다 하니."(1절)


사울은 전쟁 중에도 계속 다윗의 행방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쟁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 다윗이 있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전쟁을 하다 말고 다윗을 잡으려고 좇아갑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판국에 왕이라는 사람이 전쟁은 미루어두고 다윗을 잡으러 간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러니 나라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질투하는 것은 이렇게 무서운 감정입니다.. 질투는 우리로 하여금 질투하는 대상 외에는 어느 것에도 집중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 가운데에도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백설 공주> 이야기입니다..




백설 공주의 어머니가 죽고 나서, 왕궁에는 계모 왕비가 들어오게 됩니다..


그런데 이 왕비에게는 요술 거울이 있었습니다.. 왕비는 아침에 일어나면 요술 거울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거울아, 거울아, 이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그러면 요술 거울은 어김없이 대답합니다..


"왕비님.. 왕비님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우아하고 가장 예쁘십니다."




그러면 왕비는 "그렇지? 맞았어" 하고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합니다.. 이것이 왕비의 하루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백설 공주가 자라가며 여성으로서 성숙한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무렵 어느 날 왕비가 요술 거울을 향해 똑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그런데 요술 거울이 뜻밖의 대답을 하는 겁니다..


"왕비님.. 왕비님은 여전히 이 세상에서 예쁘고 우아하고 아름다우신 분입니다.. 그러나 왕비님보다 더 예쁜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백설 공주입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왕비는 무서운 질투심에 불타오릅니다..




그리고 백설 공주를 없애기 위해서 너무나도 추악한 짓을 서슴지 않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왕비는 허물어져 갑니다..」


질투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 정상적인 생활을 다 빼앗아 갑니다.. 그렇게 무서운 죄악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질투는 우리 자신을 완전히 파괴시키는 죄악입니다.. 다윗을 질투했던 사울 왕의 최후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울 왕은 점점 능력을 잃어갔습니다.. 무기력하고 지혜 없는 왕으로 전락합니다..




그는 마침내 전쟁에서 패배한 후 수욕감과 모멸감을 견디지 못하고 병사의 칼에 엎드러져 스스로 죽고 마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합니다..


모차르트를 질투했던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최후는 어떻습니까?

그는 미쳐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신앙을 저버리고 하나님을 저주하기까지 합니다..




"하나님.. 나는 당신을 저주합니다.. 모차르트에게 주신 그런 재능을 왜 저에게는 안 주셨습니까?" 하고 말입니다..


(3) 셋째, 질투의 배후에는 악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질투라는 것은 단순한 심리적 감정이 아닙니다.. 질투의 배후에는 뭔가가 있습니다.. 질투에는 질투의 영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악령>이라고 말합니다..


질투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사탄의 도구>로 쓰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 이튿날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그가 집 안에서 정신 없이 떠들어대므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그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하나님이 부리신 악령이 사울에게 내렸다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이 부리신 악령> 이라는 말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악령을 거느리는가> 하고 궁금해 합니다..


그러나 악령도 하나님의 주권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 악령이 사울에게 내려서 다윗을 질투하게 만들었고 오로지 다윗을 죽이기 위한 비참한 인생을 살게 했습니다..


질투는 인간 사회에서 평범한 사건이 아니라는 것, 질투의 배후에는 질투의 영이 있고 악령이 있다는 것, 이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신약에서도 변함없는 가르침입니다.. <야고보서 3장 14,1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데도 지혜, 즉 꾀가 있어야 합니다.. 남을 끌어내리고 중상모략 하는 사람들이 이를 위해 얼마나 많은 꾀를 냅니까?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시기하는 지혜는 위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입니다.. 질투의 영은 곧 악한 영입니다..


이 악한 영은 궁극적으로 질투하는 상대방을 허무는 것이 아니라, 질투하고 있는 나 자신을 파괴시키는 것입니다.. 바로 내 안에 부패성을 충동질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길을 갈 때, 우리는 하나님이 각자에게 원하시는 모습대로만 걸어가면 됩니다.. 그런데 질투는 자꾸 다른 사람을 쳐다보고 비교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인생을 똑같이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신기하게 다릅니다.. 우리는 다 독특한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나>는 다른 누구가 아니라 그냥 <나 자신>이 되면 됩니다..







꼭 탁월하게 되어서 1등을 차지하는 사람만이 가장 위대한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2등도 쓰십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시려고 꼴찌도 쓰십니다..

미련한 자를 들어서 지혜롭게 쓰셔서 지혜로운 자를 놀라게 만드시기도 하는 분이십니다..







최고가 되어야 가장 위대한 인생을 사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그것이 바로 사탄입니다..


2. 「평범함을 사랑하라..」

「저의 어렸을 때의 기억에 의하면, 저의 어머니에게는 제가 이해하기 어려운 <두 가지 좋아하시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레슬링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후에도 케이불 방송에서 레슬링이나 스모를 하면 제가 강력 추천해 드렸습니다..




천상 여인이셨던 어머니가 그렇게 거칠고 피를 흘리는 레슬링에 심취하는 것을 보면서 어린 마음에 상처 아닌 상처를 받기도 했습니다..


또 하나는 예쁜 그릇을 모으는 것입니다.. 예쁘고 아름다운 그릇이 있으면 꼭 사십니다.. 월부로 사십니다..




제가 알기로는 집안 살림이 그리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도 그릇은 꼭 사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더욱 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이상하게도 그런 그릇들은 평소에는 쓰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큰 유리창이 있는 장에 그릇들을 진열해 놓으시고는 쓰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매일 문지르고 딱아 줬습니다..


어린 마음에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집에서 항상 쓰는 그릇들은 다 평범한 것들입니다.. 매일 밥상에 올라오는 밥 사발, 컵 등 조그마한 그릇들이 날마다 쓰임을 받습니다..


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노래로 하나님에게 쓰임 받으려면 노래를 굉장히 잘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파바로티, 도밍고, 조수미 같은 가수들은 1년에 한 두 번 열리는 큰 음악회에 나와서 노래하면 그뿐입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은 주일이면 매번 찬양대에 서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놀랍게 쓰이고 있습니다.. 최고가 되어야 쓰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모습 그대로 날마다 주 앞에 나와 헌신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아름답게 쓰고 계십니다..


「미국의 흑인들에게 "당신이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그둘은 틀림없이 마틴 루터 킹 목사를 꼽을 것입니다..

그는 흑인들의 자유와 권익 신장에 크게 기여했던 아주 훌륭한 지도자였습니다..






마틴 루터 킹 외에 또 한 사람을 꼽으라면 아마 말콤 엑스라는 지도자를 꼽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전기를 읽어 보면, 말콤 엑스는 어렸을 때부터 백인을 미워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백인을 미워하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에는 <나도 백인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까만 피부를 희게 하려고 크림으로 계속 피부를 닦아낸다든지, 또 머리에 물을 들여서 검은 머리카락을 감춰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더 비참해져 갔다고 고백합니다..






"내 속에는 증오만 쌓여갈 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빛이 찾아왔습니다.. 놀라운 발견이었습니다..



그것은 <나는 백인이 될 수 없다>는 깨달음입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지만 저는 그 순간 그 사실을 너무나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백인이 되지 말자.. 나는 흑인이 되자..>




나는 그때, 흑인인 나의 이 모습 그대로 나도 숭고하고 아름다운 존재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사람이 흑인의 영웅으로, 또 지도자로 부상하면서 흑인 사회에 유행하게 된 유명한 모토가 있습니다..

"Black is beautiful" 즉, "검은 색은 아름답다"는 말입니다.. 흰 색이 아름다운 것처럼 검은 색도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사람은 각자 나름대로의 독특함이 있습니다.. 그 사람만의 아름다움과 개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을 가지고 그것을 부지런히 개발하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인생을 걸어가면 됩니다..


다른 사람을 쳐다볼 필요가 없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비로소 질투의 영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3. 「이웃을 축복하라..」

질투의 영을 극복하려면 이웃을 축복할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웃을 칭찬할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질투의 반대 개념은 칭찬입니다.. 혹은 축복입니다.. <질투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적극적으로 이웃을 칭찬하고 축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그렇게도 모질게 모차르트를 질투한 반면, 모차르트는 이 질투의 유혹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모차르트는 어느 날 아주 탁월한 음악인을 한 사람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후배인 베토벤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베토벤을 질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사람을 주목해서 보라.. 그는 세계 음악사에 남을 놀라운 인물이 될 것이다" 라고 말해서 베토벤을 세워주었습니다.. 얼마나 좋은 태도입니까?




본문 말씀 <사무엘상 18장>을 읽을 때마다 마음 속에 계속 떠오르는 질문이 한가지 있습니다..

만약 사울이 다윗과 함께 돌아올 때 "위대한 다윗 장군 만세! 다윗은 만만을 죽였고 우리 사울 왕은 천천을 죽였다"고 외치는 백성들의 소리를 듣고도 <질투하지 않았다면 과연 사울은 어떻게 됐을까> 하는 것입니다..


만약 사울 왕이 "옳소, 하나님은 우리나라에 놀라운 후계 지도자를 한 사람 주셨소.. 우리 민족에게 다윗과 같은 지도자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복입니까?




다윗은 우리 조국의 미래요, 우리 역사의 미래입니다.. 다윗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라고 하면서 군중들 가운데서 다윗의 손을 들었더라면 국민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겠습니까?


지금의 유태인을 붙들고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십시오.. 사람들은 틀림없이 다들 다윗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사울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사울 왕이 그 당시에 다윗을 축복하고 다윗을 세웠더라면, 건국의 시조요 또한 다윗이라는 성군을 배출한 위대한 지도자로 백성들에게 기억되는 복을 누렸을 것입니다..


4. 두 가지 선택..

만약 사울이 다윗을 격려하고 세웠더라면, 이스라엘의 역사와 또 사울 왕 개인의 역사는 얼마나 많이 달라졌겠습니까?

본문에서 매우 대조적인 말씀을 발견하고 충격으로 다가오는 도전을 받았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간단한 말이지만 하나님이 사울을 떠나셨다는 이 말이 얼마나 비극적입니까? 하나님은 질투하는 사울을 버리셨습니다..


이 구절은 동시에 극적인 대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떠났고 다윗과 함께하셨다>는 것입니다..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울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다윗은 목숨의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사울을 깍듯이 왕으로 모셨습니다..


우리가 다윗의 생애를 보면서 감동받는 것은 다윗이 끝끝내 일관된 자신의 태도를 잃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자기의 목숨을 노리던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왔은데도,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자를 대적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견지합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내 마음에 합한 사람> 이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극단적인 대조를 보십시오.. 하나님은 질투하는 사울을 버리시고, 다른 사람을 축복하고 격려할 줄 알았던 다윗 편에 서서 그의 일생을 인도하십니다..


여기서부터 이미 우리는 범상치 않을 다윗의 복된 미래를 짐작하게 됩니다.. <14절>에는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는 말씀이 나옵니다..

다윗이 핍박을 받으면서도 지혜롭게 행했고 여호와는 그와 함께 계셨습니다..


여기에 두 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질투의 영을 다스리지 못하고 방치하여 사울과 같은 인생을 살 수도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버리실 것입니다..


그런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좀더 핍박을 받고 좀더 어려움을 당한다고 해도,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끝까지 삶의 의무와 소명을 잃지 않고, 다른 사람을 축복하고, 격려하는 삶을 사시겠습니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삶, 그리하여 더 지혜로워지고 더 용기를 내게 되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일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취를 남긴 다윗과 같은 인생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성령님 도와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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