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 축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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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29일 주일 설교 - 개혁하는 교회 (계 22:18,19절)(18,19절)
 이기남    | 2023·10·28 08:25 | HIT : 65 | VOTE : 1
* 설교 - 개혁하는 교회 (계 22:18,19절)(18,19절)


「개혁교회」는 언제나 개혁하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개혁교회가 「참 교회」입니다.





그러나 「개혁한다」는 이 말이 언제나 「계속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더하거나 빼거나 해서 <새로운 것>을 만든다면, 그것은 재앙을 받을 일이 됩니다.




왜냐하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여함에서 제하여 지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 <요한계시록 22장 18,19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개혁」은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가르침」 이외에 「새로운 가르침」을 말한다면, 그것은 <헤테로독시>(Heterodoxy), 즉 <이설>입니다. <이단>입니다. 재앙 받을 일입니다.


오류의 입장에서 「진리는 새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는 이미 과거에 알려져 있었으므로, 그 새로움은 「과거로 돌아감으로써의 새로움」입니다.


「개혁」은 「알려진 과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미 「과거에 명백하게 알려진 그 <진리>에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옛길」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새로운 것을 들고 나와서 종교 개혁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명백히 알려진 진리>를 가지고 종교 개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년)는, 「칼빈(John Calvin, 1509-1564년)은 새로운 교회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가장 오래되고 가장 참된 교회, 그러나 지금 파괴된 교회를, 그 오래되고 참된 교회로 되돌리려 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진리」는 이미 명백하게 알려져 있습니다. <신명기 30장 11-14절>을 보십시오.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진리>는 이미 과거에 알려져서 우리의 입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과거에 명백히 알려진 그 진리」를 지키지 않습니다. 실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익과 편리를 위해서」 「새로운 가르침」을 만들어 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의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들의 욕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고르반」이라는 새로운 교훈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새로운 다른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사람의 향락과 쾌락을 충족시켜 주는 새로운 가르침」을 만들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즐거움과 편리를 위해서 고안된 이 새로운 교훈을 제거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새로운 것을 버리고, 「과거에 명백히 알려진 그 진리로」 돌아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과거에 명백히 알려진 진리」, 「이미 우리가 우리의 입으로 말하고 있는 진리」 가운데서, 「가장 명백한 진리」는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첫 장인 <창세기 1장>이 끊임없이 말하고 있는데로, 「인간이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이라는 진리」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이라는 진리」를 부정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인간은 피조물이며,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도 있겠습니까?


「교회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는, 온 세계가 결속해서 이 「명백한 진리」,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진리」를 부정해 왔음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이라」는 「새로운 가르침」을 만들고 전파하는데 전 세계가 하나가 되어 왔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진리」는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라면, 모든 것은 우리에게 맞추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즐거움과 편리」가 「진리의 기준」이 되고, 「우리의 감정을 고양시키고 우리를 편하게 하는 것」이 「선이며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우리의 향락과 편리는 진리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진리이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엄격히 맞추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우리에게 봉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진리에 따라」 통제되어야 합니다. 억제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 받는 자가 아니라, 「예배 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반감을 가지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억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우리에게 맞추어 조정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찾게 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열심히 그리고 은밀하게, 「인간이 하나님이라는 새로운 교훈」을 만들어 나갑니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면 「우리의 향락과 편리」가 「진리의 기준」이 됩니다.

우리의 감동과 재미가 「진리」가 됩니다. 우리에게 <쉬운 것>, 즉 <우리에게 봉사하는 것>이 「진리」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어려운 것」, 즉 「우리가 그것에 우리를 맞추어야 하는 것」은 위선적인 것이고 억압적인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쉽고 재미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어렵고, 우리 자신을 억제해야 하고, 우리의 힘든 노력을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은 진리가 아닌 것입니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이 이념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줍니다. 모든 것이 우리에게 맞추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자신을 억제해서 오히려 「우리 자신을 그것에 맞추어야 할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새로운 가르침」은 <우리가 피조물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저항하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는 이 「새로운 가르침」에 저항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새로운 가르침」이 우리에게 「가장 편안하고 가장 감미로운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 준다면, 그것보다 더 우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시대가 점점 악해 진다는 것은 「악이 점점 더 험악한 겉모습을 가질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악이 더 영리해 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악은 <우리를 더욱 만족시켜 주는 겉모습>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탄이 「광명의 천사」를 가장하고, 어둠의 일꾼이 「의의 일꾼」을 가장하는 그 일이 「점점 더 우리를 매혹하는 겉모습」을 가져서, 「우리가 거부하기 힘든 강한 힘」을 가지게 될 것임을 의미합니다.


「인간을 섬긴다는 것」이 인간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림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인간을 섬긴다는 것」은 「인간을 인간의 자리에 머무르게 함」을 의미합니다.



「인간을 예배 받는 자가 아니라, 예배하는 자에 머무르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목회자의 존재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신"(빌 2:5절) 우리 「주님의 사역」은, 「인간을 하나님의 자리에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 올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앞 부분에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인간에 관한 지식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하나님과 인간의 동등성」을 결코 암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꾸로 「<하나님의 높으심>에 관한 지식」은 필연적으로 그 안에 「<인간의 낮음>에 관한 지식」을 포함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하나님됨>을 알면 알수록, 우리 인간의 <죄인됨>을 더욱 극명하게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만한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을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온 세상에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대로 인간은 <하나님의 벗>입니다. <하나님의 파트너>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인간이 하나님과 동등한 자」임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아담을 유혹했던 그 유혹, 「너가 하나님이 되라」는 그 유혹은 우리가 저항할 수 없는 가장 「강력한 유혹」입니다.

「이미 알려진 진리 가운데서도 가장 확실한 진리」인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그 가장 확실한 진리」를 부정하게 할 만큼 <가장 새롭고 강한 가르침>입니다.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1452-1498년)를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순교자」라고 합니다.


「사보나롤라」는 <르네상스>를 거부했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역행했던 「시대 착오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메리츠 패밀리>가 주도하는 <프로랜스의 르네상스>는 결국 「인간의 향락과 그의 갈망과 그의 편리를 진리의 기준으로 삼으라」는 가르침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너를 하나님의 자리에 올리라」는 역사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시대의 정신에 역행하는 「시대 착오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순교」했습니다.


「인간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리라는 이 가르침」은 교회 안에 들어와서 우리가 포괄적으로 「자유주의」라고 부르는 하나의 거대한 전통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개혁교회>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가지는 이 새로운 가르침」에 저항해 왔습니다. 거기에 저항할 의무를 스스로에게 부과해 왔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이라는 이 가르침」은 하나의 중심을 가진 많은 동심원들처럼, 질적인 면에서 그리고 양적인 면에서 다양하게 전개됩니다.


「이성주의적인 자유주의」뿐 아니라, 인간의 감정의 고양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 「감정주의적 자유주의」도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베드로를 책망하신 바로 그 일」,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구별하지 않는 것」을 오히려 장려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보수주의」는 당연히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의의 보수주의」입니다.

그러나 보수주의를 하나님의 진리의 보수 대신에 「인간의 정욕의 보수주의」로 그 의미를 바꾼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을 올리는 또 하나의 자유주의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말하는 자가 아니라 <듣는 자>입니다.



듣는 자로서의 인간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말하는 자의 자리>에 올리는 것은, 거룩함과 속됨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는, 문화는.. 이론으로, 실천으로.. 또 명시적으로, 묵시적으로.. 이 새로운 이념을 확장하는 일에 결속되어 왔습니다.

인간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리는 이 일에 결속되어 왔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린다는 것>은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입니다.



철저히 <듣는 자>로서 나아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배에서 말하는 자가 아니라 <듣는 자>입니다.


<설교>는 그것이 <하나님 말씀의 대언>인 한에서, 칼빈의 말대로 「예배의 혼」입니다. 따라서 <설교>에서 우리는 더욱 철저하게 듣는 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봉독은 그 설교의 시작이며 끝이며 근원입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대행되고 있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현재적 행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봉독될 때에 인간은 가장 절대적으로 그리고 가장 철저하게 <듣는 자>입니다.


현대를 「세속주의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세속주의>란 세상의 모든 것이 속되다는 주장입니다. 거룩의 영역, 성의 영역이 세상에는 없다는 주장입니다.

여기서 거룩하다, 속되다 하는 것은 위생적이냐, 아니냐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속되다는 것」은 인간이 그의 의도와 편리를 위해서 자신에게 봉사시킬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성스러운 것」, 「거룩한 것」은 오히려 「인간이 자신을 거룩한 것에 맞추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즐거움과 편의를 위해서 사용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일의 의미」가 이것입니다. 「성전의 의미」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셨을 때에 모든 것을 성스럽게 하신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을 속되게 하신 것도 아닙니다.




에덴 동산의 「각종 나무의 실과」는 아담이 임의로 먹게 하셨습니다.



그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두 나무의 실과」는 먹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사용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그 의지를 실행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에, 거룩의 영역, 성의 영역이 있다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좋아도 「우리가 이용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이 세계의 「주」가 아니라,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속주의>는 세계의 모든 것이 인간의 의도대로 이용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이 스스로를 「세계의 주」라고 주장하게 가르칩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임의로 사용할 수 없는 것을 사용하도록 가르치는 것」과,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된다는 가르침」이 같은 가르침이었던 것과 꼭 같이,





「세속주의」는 「인간이 모든 것을 그의 의도대로 사용할 수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다시 말해 「모든 것이 속되다」고 가르침으로써, 「인간이 하나님임을 가르칩니다.」


「에스겔」은 「성전」을 갈망했습니다. 「성일」을 갈망했습니다.

「성전이라 불리는 전이 아니라, <거룩히 구별된 참 된 성전>을 갈망했습니다.」



「성일이라 불리는 날이 아니라, <인간의 향락과 편리를 위해 살지 않는 참된 성일>을 갈망했습니다.」


모든 날이 속된 날이 아니라, 「성일을 가진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전이 속된 전이 아니라, 「성전을 가진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제사장들이 오히려 거룩함과 속됨을 분변치 않으며, 사람으로 그것을 분변하게 가르치지 않고 있음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성일과 성전을 가지게 함으로써, 그로 하나님의 백성되도록 가르쳐야 할 제사장들」이 오히려 앞장서서 「거룩의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치고 있는 그 현실」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거룩의 영역의 봉사자>인 그들이 오히려 거룩의 영역을 부정하는 세속주의자임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고 인간은 인간이라는 이 진리는 이미 과거에 명백히 알려져 있는 진리입니다.

이미 우리의 입이 말했던 진리입니다. 따라서 이 진리에는 조금의 <더함>이나 <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 진리를 부정하거나 약화시키는 어떤 가르침이 있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을 암시하는 어떤 실천이 있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세계는 결속해서 이 진리를 부정해 왔습니다.



다양한 빛의 모습으로 인간을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 올리는 <어두움의 가르침>을 만들어 왔습니다.



이론으로, 실천으로 그리고 명시적으로, 그리고 암시적으로 이 <새로운 어두움의 가르침>을 전파해 왔습니다.


「개혁교회」는 언제나 「개혁하는 교회」입니다.

「개혁교회」는 이미 <과거에 알려진 그 명백한 진리>에로 돌아가는 그 「전투 중에 있는 교회」인 것입니다.



<터툴리아누스>, <칼빈>, 그리고 <칼 바르트>가 이 싸움을 싸웠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사를 세우신 이유>는, 「인간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리는 그 일에 저항해서 <인간을 인간의 자리에 두기 위함>이며」,



「인간은 예배 받는 존재가 아니라, <예배하는 존재임을 증거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진실로 인간을 섬기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교회>의 현재와 미래가 오늘 우리들이 「이미 과거에 명백히 알려진 진리」, 「이미 우리가 우리의 입으로 말하고 있는 진리」,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진리」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갖느냐에 의해서 결정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모든 <교회>의 일어서고 넘어짐이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의 진정성」에 의해서 결정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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