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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12일 주일 설교 - 염려하지 말라 (마 6:25-34절)(25절)
 이기남    | 2023·11·11 12:31 | HIT : 67 | VOTE : 1
* 설교 - 염려하지 말라 (마 6:25-34절)(25절)





1. <로마서 8장 32절> 말씀은 제가 『로마서』에서 가장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아끼시고 편들어 주시는지>를 이 구절을 암송할 때마다 늘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제가, 모든 것을 주실 것인지 묻고 있는 하나님은, 이미 저에게 자기 아들을 주신, 바로 그 하나님 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더 큰 것으로부터 작은 것으로 논증을 진행 시켰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우리에게 자기 아들이라고 하는 최고의, 그리고 가장 귀한 선물을 주셨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그 밖의 것들은 더 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주심으로써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생명을 주셨고,)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속적으로 끊임없이 풍족하게 주실 것이라는 보증입니다.(생활도 책임져 주십니다.)





<로마서 8장 32절>을 묵상하면 함께 생각나는 성경 말씀들이 있습니다.





(1) 첫째, <누가복음 18장 1-8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 "





이 난해한 비유의 바른 해석은 <18장 1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결국은 <로마서 8장 32절>의 말씀으로 풀어야 정확한 답이 나옵니다.





<네가 원하는 대로 응답되지 않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낙망하지 말라. 하나님은 이미 아들을 주시지 않았느냐?>





(2) 둘째, <고린도후서 12장 7-10절>의 말씀입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사도 바울에게 주어진 가시에 대한 내용으로서, 정확한 해석을 요하는 부분입니다.



이 말씀도 <로마서 8장 32절>의 말씀을 근거로 해석하면 쉽게 풀립니다.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구하는 바를 주시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뭔가 부족하셔서 그런 것이 아니라, 구하는 자 안에서 더 포기되어지고, 더 깨지고, 더 뽑혀져야 할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3) 셋째, <마태복음 10장 29-31절>의 말씀입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로마서 8장 32절>의 말씀이 이 말씀의 내용을 더 선명하게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관리하지도 않는 머리털 숫자까지 관리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아들까지 이미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일들에 대해서 얼마나 더 철저하게 관리하시겠는가, 그러니 아무것도 두려워 하지 말라.>





우리는 이 세상에서 최고의 부자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주신, 바로 그 하나님 이십니다.



그 분이 왜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안 주시겠습니까?





2. 그리스도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가 있습니다..





(1) 첫째가, 「이기적인 그리스도인」 입니다.



<이기적>이라는 말을 그리스도인 앞에 붙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이 죽고 자신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사는 사람이 어떻게 이기적일 수 있겠습니까?





(2) 또 한 가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그리스도인」 입니다.



자신 안에 예수님이 계시는데 어떻게 어리석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일 수 있어도, 결코 어리석지 않습니다.. 세상의 지혜와 비교할 수 없이 지혜롭습니다.





(3) 예수님은 그리스도인 앞에 붙일 수 없는 또 한가지 표현을 알려 주십니다. 「걱정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우리 안에 아무 염려가 없습니까? 정말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습니까?





때때로 그런 것 같다가도 <돌발적인 사태나 위기를 만나면> 순식간에 염려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다면, <염려는 점점 줄어들어야 마땅합니다.>



신앙을 갖고 나서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는 결정적인 변화가 바로 <염려에서 풀려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오늘 이 <염려의 문제에 대해 너무나 분명한 처방>을 내려 주십니다..



<염려가 대체 어디서 시작되는지>, <이 염려를 어떻게 내 안에서 내쫓을 수 있는지>, <이 염려와 영원히 결별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니다..





왜 우리는 염려합니까? <25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염려는 먼저 어디서부터 시작됩니까?



살기 위해서 의식주가 필요하다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육신을 가진 인간은 먹고 마셔야 살고, 입어야 삽니다.



예수님은 먼저 인간의 의식주가 아무 가치도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의식주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의식주가 먼저가 아니고, 의식주가 더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의식주 때문에 걱정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중요한 것부터 따진다면 <목숨이나 몸>이 <음식이나 옷>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런데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것>과 <중요하기 때문에 걱정하는 것>은 다릅니다.





중요하기 때문에 모아야 하고 쌓아야 합니까? 모으고 쌓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부족>을 염려하는 것이고, <안전>을 염려하는 것이고, <남에게 무시당하는 것>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범죄하고 난 후에 에덴에서 쫓겨나면서 그들이 처음으로 한 일이 <염려하면서 쌓는 일>입니다.





인간은 에덴에서 동쪽으로 동쪽으로 가면서 먼저 <에녹성>을 쌓더니, <창세기 11장>에 이르러서는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내고자 한 것이고, 욕망에 사로잡혀 자기가 하나님에게까지 이르겠다는 것입니다.





불안하면 부지불식간에 쌓습니다. 불안한 사람은 <담을 쌓고>, 길 거리에서도 <돌무더기를 쌓고>, 뷔페 식당에서도 <음식을 쌓아서> 가져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러 번 먹어도 괜찮은데 왜 높이 쌓아서 들고 옵니까? 내 몫에 대한 무의식적인 염려 때문입니다.





* 우리는 왜 염려 합니까?



(1) 첫째로, 예수님은 우리가 염려하는 것이 <믿음이 작기 때문>(26-30절)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작은 믿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다가 손을 들어 공중에 나는 새를 가리키십니다. <26절>을 보십시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이 질문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새가 누구 때문에 날아 다닙니까?> <누가 새를 기릅니까?> <사람과 새 중 어느 쪽이 더 귀합니까?>





사람이 더 귀한데 <왜 새도 하지 않는 일을 사람이 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새도 의식주 걱정을 하지 않는데 <왜 사람이 그 걱정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왜 짐승도 하지 않는 걱정을 사람이 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머뭇거리지 않고 또 물으십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십시오.. 걱정해서 키가 크는 것이 아닙니다.



엄마가 걱정해서 생명이 잉태된 것이 아니고, 아이가 부모의 염려 때문에 자란 것이 아닙니다.



클 때가 되어서 크고, 멈출 때가 되어서 더 이상 자라지 않는 것입니다.





<28,29절>을 보십시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솔로몬 왕이 화려하게 차려입은 옷>과 <들꽃의 아름다움>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것>과 <사람이 디자인한 것>의 차이를 보라고 하십니다.





백합화는 예수님이 살던 지역에서 흔히 피던 꽃이었습니다. 꽃은 대개 잠시 피었다가 집니다. 하루살이와 같습니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들꽃 하나 만큼의 아름다움에도 미치지 못하는 그 옷 때문에 왜 염려하느냐는 것입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예수님은 계속해서, <들플도 벌거벗은 채 버려두지 않는데 하물며 사람을 헐벗게 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럼에도 인간이 걱정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그 답을 알려 주십니다. 믿음이 작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 믿음도 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것이건 믿음을 갖고 삽니다.



심지어 <아무것도 믿어서는 안되고, 어떤 사람도 믿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도 믿음입니다.





믿음이 크면 문제가 없습니다. 믿음이 작아서 문제입니다.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하는 이유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필요합니다.>





상황이 나빠서 염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작아서 염려하는 것입니다.



아직 닥치지도 않은 일을 놓고 왜 염려합니까? 믿음이 작기 때문입니다.





근원적으로 불안에서 해방되는 방법, 자유로워지는 방법은 <믿음이 커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않는 길은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상황을 바꾸든지>, <믿음을 키우든지> 둘 중 하나 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 둘은 별개가 아닙니다.



<상황을 바꾸는 가장 빠른 길>도 사실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대응하면 반드시 상황이 바뀌게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물론 염려로 대응해도 상황은 바뀝니다. 더 나빠집니다. 염려는 사실 <더 나빠질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염려」는 눈앞에 펼쳐진 지금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이 현실이 더 나빠질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생기는 마음>입니다.





「염려」는 단지 <부정적인 관점으로 바라본 부정적인 생각>입니다. 그렇게 바라보는 태도에서 비롯된 <경향성>입니다.





「믿음」은 이 경향성이라고 하는 회로를 바꾸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바꿉니까?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는 분의 말씀>을 따라 <내 생각의 회로>를 바꿉니다.





염려는 고장난 믿음입니다. 염려는 회로가 망가진 믿음 체계입니다. 염려는 죄인들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병든 사고 체계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믿음에 붙들려야 합니다.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 우리는 왜 염려 합니까?



(2)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가 염려하는 이유가 우리 안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31,32절)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부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염려하지 말아야 할 두 번째 이유가 무엇입니까?



염려는 이방인들의 습관입니다. <염려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생활 방식입니다.> 그들의 일상은 염려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염려란, 사실은 <죄인들의 생활 방식>입니다.



죄는 분리를 가져 옵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분리를 초래합니다. (대지에서 뿌리가 뽑힌 나무.)





하나님과 떨어지면 나타나는 첫 번째 증상이 <불안>입니다. 불안하면 생각이 부정적이게 됩니다. 불안하면 생각하는 것마다 염려가 됩니다.





염려는 암세포보다 빨리 자랍니다. 염려는 내 안에서 순식간에 나를 채울 만큼 자랍니다. 염려가 염려를 끝없이 낳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면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빛이 없으면 미래가 어둡습니다. 믿음이 작으면 염려가 커집니다.





염려해야 내가 살아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염려를 마치 취미 생활처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 곁에 있으면 염려가 전염됩니다. 입만 열면 불안한 얘기를 하기 때문에, 듣다 보면 내 안에서도 염려가 자라기 시작합니다.



염려가 자라면 행동이 이상해 집니다.





예수님은 떠나시기에 앞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마 제자들의 얼굴에서 어두운 표정을 보셨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갈수록 근심이 늘어나는 세상입니다. 갈수록 불안한 세상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 불안과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다른 길은 없습니다.





위험을 분석하고 예측하고 관리한다고 걱정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원칙은 <믿음이 없으면 근심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믿음이 차오르면 근심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이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기도의 본질>을 알려 줍니다. <빌립보서 4장 6,7절>을 보십시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마음과 생각을 지켜야 염려나 불안에서 벗어난다고 합니다.



<내 생각으로> 하루 종일 생각해 봐야 불안이고 염려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을 압도하는 <예수님의 생각>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어떻게 들어갑니까?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면 됩니다.



<설교 듣고>, <말씀 공부하고>, <말씀 묵상하고>, <말씀으로 기도하고>, <찬양하고> 이것이 믿음의 능력이요 믿음의 증거입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는데도 감사할 수 있습니까? 있습니다. <믿음 때문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나아갔고, 믿음으로 기도했고, 믿음으로 이미 이뤄진 일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때 벌써 기쁨을 맛봅니다. 상황은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데 기쁨이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고백한 기쁨이 바로 이 기쁨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곧 망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전쟁으로 끔찍하게 변한 예루살렘의 모습이 눈 앞에 현실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에 발견한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회복에 대한 소망입니다. 그는 아름다운 고백을 남깁니다. <하박국 3장 17,18절>을 보십시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나님 때문에 즐겁습니다. 하나님의 성품 때문에 기뻐합니다. 내 형편과 처지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기 때문에 더 이상 걱정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능력 있다는 것을 알면 자녀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비록 야단치신다고 해도 부모가 마음을 돌이킬 것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야단을 맞아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 이십니다. 심판은 언제나 구원을 위한 메시지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의 마음에 있던 근심과 걱정, 염려의 구름이 한순간에 걷히고 찬란한 하나님의 빛을 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편지를 씁니다. <빌립보서 4장 4절>을 보십시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그가 기쁘지 않은데 이런 편지를 썼겠습니까? 그가 감옥에서 우울한 표정으로 이 편지를 썼겠습니까?





참 신기한 일입니다. 감옥에 있어도 감옥 밖에 있는 사람보다 기뻐하는 사람이 있고, 세상에서 자유롭게 다녀도 감옥에 있는 사람보다 더 갇히고 묶여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비록 <감옥 안>에 있었지만, 동시에 <주 안>에 있었기 때문에, 염려로부터 자유로웠고 염려가 자신을 침범할 수 없기에 솟아나는 기쁨이 흘러 넘쳐서 이런 편지를 쓸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할 때도 충만한 기쁨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을 보십시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염려하면 이 <세 가지>가 다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이 염려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염려에서 벗어난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내가 염려하지 않고 있다면 자연스럽게 기쁨이 있고,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감사가 솟아오르며, 쉴 새 없이 아버지께 감사와 기쁨을 돌려드리게 됩니다. 곧 가장 깊은 기도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 우리는 왜 염려 합니까?




(3) 셋째로, 예수님은 우리가 염려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추구하기>(33,34절)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자신을 앞세우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33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왜 염려합니까?> 세 번째 이유는 <자기 자신의 나라를 갈망하기 때문>입니다.





<염려하지 않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어떤 것입니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삽니다.



그러면, <염려하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어떤 것입니까? 먼저 자신의 나라와 자신의 의를 구하며 살아 갑니다.





자신의 나라, 자신의 뜻, 자신의 야망, 자신의 소유를 구하며 살기 때문에 <늘 불안하고 염려가 됩니다.>



<자신의 도덕적, 윤리적 기준을 고집하기 때문에> 염려가 많습니다. 걱정이 많습니다. 짜증이 많습니다. 결과적으로 분노가 많습니다.



악 순환입니다. 자신을 추구하면 염려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추구해서는 염려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염려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을 추구하는 궤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회전문에서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추구하는 궤도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세우라> 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어리석을 수 없고, 예수님을 거부한 사람이 지혜로울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지혜란 먼저 할 일은 먼저 하고 나중에 할 일은 나중에 하는 것입니다.





급한 일이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급한 일 먼저 하다가 정작 중요한 일은 제대로 못하며 살아갑니다. 자신의 일은 다 급한 일 같고 중요한 일 같기 때문입니다.





임종을 앞두면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된 답니다.



<내가 왜 좀 더 많이 사랑하지 못했나>, <내가 왜 좀 더 빨리 용서하지 못했나>,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음을 알게 된답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 <주님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따르는 일>, <이웃을 용서하는 일>, 무엇보다 이것들이 중요한 일입니다.



이 중요한 일을 하면 염려가 생기지 않습니다. 순서를 바로잡으면 염려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 나라를 구하고 하나님과 관계를 정립하면 나머지는 책임져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을 제일 먼저 기억하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먼저 분별하고 결단하면, 나머지는 자신이 구하지 않아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자녀의 필요를 모르는 분이 아닙니다. 그 필요를 알고도 외면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늘 내가 처한 상황은 내가 이해하건 안하건 <최선의 상황>입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건강하면 건강한 대로 병약하면 병약한 대로 그것이 최선입니다.



최선의 상태에 있는데 왜 염려합니까? 차선이라야 불만이고 걱정이지 최선인데 뭐가 불만이고 뭐가 걱정입니까?





<3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예수님은 우리 인생에 괴로움이 많다는 것을 아십니다. 우리의 짐이 무겁다는 것도 아십니다. 그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내려 놓으라고 하십니다.





짐 중에 제일 무거운 짐이 어떤 짐입니까? 염려라는 짐입니다.



그 염려가 지금 눈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일 모레, 다음 달과 다음 해에 있는 일들 아닙니까?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내일이라는 시간이 너의 것이냐?>



<내일이라는 시간에 네가 여기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냐?> <내년에 네가 여전히 이 일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대체 누가 심어 준 것이냐?>





「아무것도 너에게 보장된 것은 없다. 그러니 내일 일을 위해 염려하지 말아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일 일은 너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다. 너의 소관이 아니다.>





걱정은 출발부터 잘못되었다는 싸인입니다.



예수님은 걱정거리가 가득한 세상에서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신앙의 풍성함을 앗아가는 염려부터 제거해야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염려가 뿌리내리기 전에, 걱정의 뿌리가 깊어지기 전에, 그 뿌리가 사방으로 뻗어 곁에서 자라야 할 작물의 뿌리를 망쳐 놓기 전에, 염려라는 독초의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습니까? 그 믿음이 날마다 커지고 있습니까? 그래서 염려가 날마다 작아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제대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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