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 축제교회

 


TOTAL ARTICLE : 1130, TOTAL PAGE : 1 / 57
2024년 4월 14일 주일 설교 - 큰 믿음 (마 15:21-39절)(28절)
 이기남    | 2024·04·13 11:20 | HIT : 154 | VOTE : 33
* 설교 - 큰 믿음 (마 15:21-39절)(28절)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식사했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한 주 동안 어떻게 살았는가를 보여줍니다.



때로는 우리가 누구이고,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한 주 동안 주로 어디서, 누구와 함께 식사하셨습니까?





1세기 당시에는 이 점이 더욱 분명했습니다. 누구와 식사를 하느냐 하는 것은 사회적, 종교적, 성적(性的) 신분을 그대로 반영했습니다.





종교적으로 깨끗하다고 생각했던 유대인들은 절대로 이방인들과 함께 어울려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유대인이라도 손을 씻지 않은 사람하고는 함께 식사하기를 꺼렸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예수님일지라도 손을 씻지 않으면 함께 식사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이런 유대인들과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의 식탁에, 그것도 부스러기라도 얻어 먹으며 참여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한 여자가 나옵니다.





또한, 예수님께 나와서 고침을 받고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로 배불리 먹은 많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어떻게 예수님이 베푸신 식탁에 참여할 수 있었을까요?


<29절>에 보면, 예수님은 ‘거기서’ 즉 가버나움을 떠나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 가셨습니다(21절).





두로는 가버나움에서 북서쪽으로 약 70km 정도 가야 하는 해안 도시입니다.



거기서 지중해 해안 길을 따라 북쪽으로 30km 더 가면 시돈이 나옵니다. 두 지역 모두, 유대인들에게는 이방 지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갑자기 갈릴리를 떠나 이방 지역으로 가셨을까요?



오늘 본문의 주인공을 만나고 다시 갈릴리로 돌아오시는 여정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방 지역으로 가신 목적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구하는 가나안 여인의 기도를 들으신 것입니다.




사도 마태는 이 여자의 이름 대신,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을 대적했던 대표적인 이방 족속이었던 ‘가나안’이란 민족의 이름을 내세워서, 여자가 과거 하나님을 대적했던 가나안 족속의 후손임을 강조합니다.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께 와서 소리쳤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22절)





쉬운 성경으로는, “주님,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생각하시고 도와주세요! 제 딸이 귀신들려서 매우 고통받고 있습니다." 입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릅니다. 세 차례나 반복해서 ‘주님’이라고 부릅니다(22,25,27절).



이 호칭은 예수님께 대한 여자의 믿음을 반영하는 고백적인 호칭입니다.




게다가 이 여자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릅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는 ‘메시아(그리스도)’로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녀는 예수님께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이고, 그 들음에 기초하여 예수님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오랫동안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접촉을 통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성경에 대해서 알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이 여자는 유대인은 아니었지만,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예수님이 “주님이시며, 다윗의 자손”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듣는 것이 이렇게 소중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0:17절)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열심히 들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께 요청합니다. “저를 불쌍히 생각하시고 도와주세요! 제 딸이 귀신들려서 매우 고통받고 있습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신 것을 들었습니다.





특별히 귀신을 쫓아 내주신 일에 대해서 들었을 것입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이 자신도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실 것을 믿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23절).



그렇지만 여자는 실망하지 않고 계속 따라다니며 도움을 외쳤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참다 못해 예수님께 청합니다.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23절)





쉬운 성경으로는, “저 여자를 돌려 보내십시오. 우리를 따라다니면서 소리지르고 있습니다." 입니다.





제자들은 여자가 저렇게 소리지르며 우리를 귀찮게 하니까, 예수님께서 뭔가 조치를 취해 주시기를 바랬습니다.



웬만하면 여자의 소원을 들어주시는게 어떤가 하는 뉘앙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24절)





쉬운 성경으로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만 보냄을 받았다." 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자주 하나님 앞에 ‘잃어버린 양들’로 묘사되고 있습니다(렘 50:6절, 겔 34:1-16절, 사 53:6절).





그러니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메시아로서, 예수님은 그들을 자신의 참된 백성으로 회복하시는 일을 우선적으로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전도의 대상이 이스라엘에게만 한정되어야 한다는 원칙은 이미 앞에서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도 밝히셨습니다(마 10:5,6절).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적어도 이 원칙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배척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실 때까지 유효했습니다.



하지만 부활 이후에 예수님은 그러한 원칙에 더는 얽매이지 않으십니다(마 28:19,20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특권을 끝까지 거절했기 때문입니다(마 23:37,38절).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를 받아들이고, 그 메시아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제사장 역할을 감당해야 했지만, 그 특권을 저버릴 뿐 아니라 메시아를 배척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이로써 자신들의 지위를 이방인들에게 빼앗기게 됩니다(마 8:11,12절, 마 21:43절).




그 때, 그 여자가 예수님께 와서 절을 하고 간청했습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25절) 매우 간절한 요청입니다.



딸을 고치실 분이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을 믿었기에, 여자는 예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자의 요청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말씀을 하십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26절)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흔히 ‘개’라고 지칭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도 이런 유대인들과 똑같이 이방인에 대해 경멸하는 호칭을 그대로 사용하셨다는 것은 충격적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28절>에서 선언하신 말씀을 볼 때, 이 말씀은 실제로 예수님 자신의 마음을 담은 표현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여인이 이러한 경멸적 호칭에 어떻게 반응하시는지 보시려고 의도적으로 사용하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예수님의 답변은 자신이 여자의 요청에 왜 선뜻 응할 수 없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여자가 대답했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7절)





이 여자는 자신을 ‘개’로 간주하신, 언뜻 듣기에도 모욕적인 말씀까지도 그대로 인정합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답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주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 논리적 근거를 과감하게 제시합니다.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여자는 예수님을 ‘주님’, 즉 주인으로 높이고, 자신을 ‘개’로 철저히 낮추면서, ‘자녀’가 아니더라도 주인의 사랑과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근거와 확신을 제시합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칭찬하셨습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28절)





쉬운 성경으로는, “여자야, 너의 믿음이 크구나! 네가 원하는 대로 될 것이다.” 입니다. 바로 그때, 그 여자의 딸이 나았습니다.





‘작은 믿음’은 예수님을 신뢰할 만한 충분한 조건들을 갖추었음에도 그것들을 실제 문제에서 활용하는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반면에, ‘큰 믿음’은 예수님을 신뢰할 만한 충분한 조건들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문제에서 불충분한 조건들을 활용하여 예수님께 대한 완전한 신뢰를 보이는 상태입니다.





대체로 제자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작은 믿음’을 보였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기적들을 보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여자’는 예수님께 대한 지식이나 정보가 지극히 제한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예수님을 처음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딸이 귀신에 들린 상황,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님의 냉담한 반응에 직면해서도 예수님께 대한 신뢰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큰 믿음’이라고 인정해주시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딸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이 모습은 <15장 앞 부분>에서 등장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매우 대조적입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깨끗해 보였고, 믿음이 있어 보였으나, 속으로는 더러운 위선자였고, 믿음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나안 여자는 이들과 정반대로 겉으로는 더러운 이방인으로 간주되었으나, 마음은 청결한 큰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개’가 ‘자녀’보다 더 큰 믿음을 보이니, 이보다 더 큰 아이러니가 없습니다.





누가 예수님께 칭찬을 받았습니까? 누가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을 경험했습니까? 누가 예수님의 혜택을 크게 받았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신뢰할 만한 충분한 성경 지식을 가진 우리는 어떠해야 할까요?



우리는 마땅히 ‘큰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예수님께 대한 지식, 이해, 신뢰를 바탕으로 우리가 인생 가운데서 만나는 모든 실제적인 문제들 앞에서 예수님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가정 문제, 건강 문제, 물질 문제, 인간 문제, 장래 문제 등 수 많은 문제 앞에서 예수님께서 ‘주님’이시고, ‘다윗의 아들’임을 믿고 고백하며, 그분께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풍성한 은혜(혜택)를 넘치게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곳을 떠나 갈릴리 호숫가로 가셨습니다(29절). 그리고 산 위에 올라가 앉으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다리를 저는 사람, 걷지 못하는 사람, 보지 못하는 사람, 말 못하는 사람, 그 밖에 많은 병자들을 사람들이 데리고 왔습니다.





이들은 병자들을 예수님 발 앞에 두었고 예수님께서 고쳐주셨습니다(30절).





말하지 못하던 사람이 말을 하고, 지체 장애인이 성한 몸을 갖게 되고, 다리를 저는 사람이 다시 걷고, 보지 못하던 사람이 다시 보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31절).





이로 볼 때, 이들 중 대부분은 아마도 두로와 시돈과 같은 이방 지역에서 예수님께 도움을 받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온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데리고 삼 일 동안이나 있었습니다. 먹을 것이 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의 사정을 자세히 말씀하십니다(32절).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제자들이 반문합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이르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가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바로 얼마 전에,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경험한 제자들이 이런 대답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들은 여전히 ‘믿음이 적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신뢰할 만한 충분한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새로운 상황에서 그것을 전혀 활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바뀌니 그들의 믿음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들이 주목하는 것은 ‘빈 들, 많은 사람, 빵을 구할 수 없다’는 상황 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를 가지고 친히 사람들에게 식탁을 베푸십니다.



사람들을 먹이시는 과정은 대체로 오병이어 때와 비슷하지만 차이점도 없지 않습니다.





떡 5개와 떡 7개, 물고기(익두스) 두 마리와 작은 생선(익두디온) 두어 마리, 남자만 오천 명과 남자만 사천 명, 바구니 열 두 개와 광주리 일곱 개, 축복 기도(율로게오)와 감사 기도(유카리스테오).



그리고 기적을 베푸신 후에 가신 곳이 게네사렛이었는데, 이번에는 마가단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빵을 먹은 사람들의 대부분이 유대인이었다면, 이번 기적으로 빵을 배불리 먹은 사람들은 대부분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열 두 바구니가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한다면, 일곱 광주리는 모든 이방 민족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가 이스라엘을 위한 메시아의 풍요로운 잔치를 상징한다면, 이번 기적은 모든 이방 민족들을 위한 메시아의 풍요로운 잔치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기적은 같은 듯하면서 다른 기적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위한, 즉 모든 인류를 위한 메시아의 풍성한 잔치를 상징합니다.





천국의 왕 메시아의 잔치에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가나안 여인과 같은 이방인들까지 참여할 것을 예고해 주는 기적입니다.




<마태복음 14장에서 16장 전반부>는 줄곧 ‘떡’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여기서 떡은 메시아의 풍요로운 구원의 잔치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믿음이 없어서 예수님을 배척함으로 풍성한 메시아의 식탁을 걷어차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 중에는 가나안 여자처럼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잔치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만으로도 구원의 풍성함을 맛보았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이방인일지라도 메시아의 잔치에 참여하게 됨을 보여줍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 믿음으로 메시아의 잔치에 참여하는 이방인들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예수님이 전파되는 곳이 어디든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잔치 상에 입맛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잔치 상에 참여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요?




①먼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자녀가 된 우리들은 ‘자녀의 떡’을 배불리 먹어야 하겠습니다.





밥투정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차려주신 밥상을 무시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풍성히 먹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모임마다 참여하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의 구원에 참여하여 산다는 것의 가장 큰 특징은 영적 배부름 곧 ‘만족’입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어 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절)라고 노래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신앙 생활은 만족입니다. 만족에서 기쁨이 나오고, 행복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한 양식을 부족함 없이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언제나 초청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절)




②다음으로, 이 풍요의 잔치에 오늘날의 이방인들을 초청하는 것입니다.





떡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어디에서 배부를 수 있는지 아는 사람, 잔치가 어디에서 벌어지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배고파 굶주리고 있는 사람을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홍수가 나도 마실 물은 희귀하듯이, 물질적인 풍요 속에 영적인 양식은 참으로 부족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참 만족과 행복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메시아의 잔치를 소개하고 초청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인생의 환경은 광야일 때가 많습니다. 먹을 것이 없는 빈들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풍성한 잔치를 벌여 놓고 계십니다. 춤을 춥시다.





큰 믿음을 가진 사람은 메마른 광야 같은 인생 속에서도 주님과 함께 나누는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큰 믿음을 주시길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가 큰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2024년 4월 21일 주일 설교 - 기도의 응답자 (마 7:7-12절)(12절)  이기남 24·04·20 154
  2024년 4월 7일 주일 설교 - 예수님의 제자가 추구해야 할 인생 (눅 6:20-26절)(20절)  이기남 24·04·06 100
Copyright 1999-2024 Zeroboard / skin by GGAM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