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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23일 주일 설교 -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마 19:16-30절)(26절)
 이기남    | 2024·06·22 10:29 | HIT : 24 | VOTE : 0
* 설교 -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마 19:16-30절)(26절)





오늘 본문은, 제자들이 거슬러야 할 시대의 흐름 중 세 번째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9장 앞 부분에서, 예수님은, 이혼을 장려하는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라고 하셨고(1-12절), 어린 아이를 무시하는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라고 하셨습니다(13-15절).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시대의 어떤 흐름을 거슬러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아마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우리 대부분은 ‘예수님께서 부자가 되고자 하는 시대의 흐름에 거슬러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라고 대답할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부자가 되고자 하는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살아야 한다면, 논리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부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은 부자로 들어와서는 안 됩니다.




이 본문을 읽고 그렇게 이해한 사람들은 기독교의 특징을 ‘청빈(淸貧)’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가난”을 기독교의 최고의 덕목으로 추구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13세기의 수도사 ‘아시시의 프란시스’(Francis of Assisi, 1182-1226년)입니다. 우리에게 ‘성 프란시스(프란체스코)’로 잘 알려져 있는 분입니다.





그는 포목상을 하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자발적 가난을 선택했고, 일생을 ‘탁발 수도사’(mendicant friar)로 살았습니다.



후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의 발자취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아시시의 프란시스’처럼 살 수는 없었습니다. 부자들도 교회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24절)는 주님의 말씀은 너무나 부담이 되었습니다.





낙타가 어떻게 바늘 귀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완전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가능성을 주님께서 조금도 남겨두지 않으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완화해 보고자 하는 노력이 교회사 속에서 여러 번 시도되었습니다.





헬라어로 낙타는 ‘카멜론’인데, 이와 아주 유사한 발음을 가진 것이 ‘밧줄’(카밀론)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설마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간다고 말씀하셨겠는가, 좀 과장하셔서 밧줄이 바늘 귀로 들어간다고 말씀하셨겠지,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씀이 아니라 어렵다는 말씀이다.” 이렇게 해석한 것입니다.





그런데 좀 더 생각해보면, 밧줄 또한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기는 마찬가지 아닙니까?





또 다른 해석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늘 귀‘는 바느질할 때 쓰는 바늘의 귀를 가리키신 것이 아니라, 큰 성문 옆에 난 작은 문을 가리키신 것이다.”





큰 성문이 닫혀 있을 때도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낸 작은 문 말입니다.



“그 문은 낙타가 짐을 싣고 들어가기에는 좁지만, 짐을 내리고 다리를 굽히고 머리를 숙이면 간신히라도 들어갈 수 있는 문이다.



이처럼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어렵기는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청빈의 덕목을 몸소 실천하며 사는 것도 칭찬 받을 일이며, 부자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고 해석해 보려는 시도도 가상하지만,



이것들이 과연 본문에서 주님께서 가르치시고자 하는 의도와 맞닿아 있는지는 다시 한번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과연 주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부자가 되고자 하는 그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의도는 「사람의 선행에 대한 보상으로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시대의 흐름」에 거스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부자에 대해서 말씀하셨을까요?



사람의 선행과 부자는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부자는 어떻게 보면 선행의 대표 주자였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으로 들어가서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왔습니다. 이 ’어떤 사람‘은 뒤에 가 보면, 청년으로 밝혀집니다. 가진 재산이 너무나 많은 부자로 밝혀집니다.





우리나라에서 청년은 고용부 기준으로 보면 18-34세입니다. 하지만 1세기 당시 유대 사회에서 청년은 이보다 훨씬 낮은 14-18세 정도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이 사람은 어떻게, 가진 재산이 너무나 많을 정도의 부를 일구게 되었을까요?





그는 ’스타트 업‘ 창업자로 성공한 사람일까요? 아니면, 재산이 많은 부모로부터 유산을 물려받은 사람일까요?





후자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자신의 공로라기보다는 부모의 혜택으로 부자가 된 청년입니다.




그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6절)




이 질문은 언뜻 듣기에, 그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찾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얻기 위한 선한 일이 어떤 것인지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의 질문을 자세히 뜯어 보면, 그의 질문 속에서 그 시대의 보편적인 생각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그 시대의 생각은 ’사람이 선한 일을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많은 선한 일들 중에서 어떤 선한 일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과 관련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는 바로 ’그 선한 일‘이 어떤 것인지 예수님께 묻고 있습니다.




1세기 당시 유대 사회에서 어떤 일들이 선한 일로 여겨졌을지,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절기마다 절대적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 제사를 드리는 일, 선한 일 중의 선한 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십일조를 드리고, 성전 세를 신실하게 납부하는 일도 선한 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자선을 베푸는 일도 당연히 선한 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선한 일들을 누가 더 많이, 그리고 더 잘 할 수 있었을까요?


당연히 부자가 잘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비가 풍부한 사람도 부자였을 것입니다.



성전에 풍성한 헌물을 바칠 사람들도 부자였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도 당연히 부자들의 몫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랍비들은 하나님 주신 가장 선명한 ’복‘의 표지가 ’부‘라고 가르쳤습니다.





유대인들은 부자를 존경했고, 부자는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으로서 아브라함과 함께 천국의 잔치에 참여할 자들로 여겨졌습니다.





현대인들이 ’부자‘하면 떠올리는 ’베니스의 상인‘이나 ’스크루지‘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를 1세기 유대 사람들은 부자에 대해서 가졌다고 보아야 합니다.




“사람이 선한 일을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고, 선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주로 부자들이고, 그러니 부자들은 당연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이 예수님 당시에 사는 유대인들의 생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이 부자 청년도 이러한 생각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질문은 예수님께 영생을 얻기 위해 어떤 선한 일을 해야 하는지 알고 싶어서 묻는 것이라기보다는,



예상되는 예수님의 대답을 통해서 그가 그 어떤 선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확인을 받기 위한 질문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시는지 보실까요?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예수님은 “영생을 얻기 위해 사람이 할 수 있는 선한 일이란 것은 없다“고 분명히 대답하십니다.



왜냐하면, 선하신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 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선하신 분이시고, 그분만이 선한 일을 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영생을 얻을 길은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선한 일을 해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킴으로써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하나님은 계명을 주심으로써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에 당연한 질문이 따라옵니다.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18절)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러자 부자 청년이 화색을 띤 얼굴로 말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이 말씀을 들은 청년은 매우 근심하며 떠나갔습니다. 그가 가진 재산이 너무 많아 예수님 말씀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22절).




이어서 하신 말씀이 그 유명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부자 청년과 예수님께서 나누신 말씀의 맥락 속에서 보면, 부자의 전형적인 특징을 찾을 수 있습니다.





부자들은 자신이 가진 돈으로 선행을 행하고, 그 선행에 대한 당연한 결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가능성은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갈 가능성과 같다, 가능성 제로다 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앞에서 부자 청년은 이웃 사랑의 계명을 다 지켜왔다고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생각하는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의 실천은 자신이 가진 재산을 가지고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웃을 구제하는 일에 얼마의 돈을 지출했을까요? 자기 재산의 만분의 일, 아니면 천분의 일 정도 지출했을까요?





사람들이 보기에 그렇게 한 것도 대단한 일입니다.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충분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은 이웃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이웃 사랑의 계명을 완전하게 실천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완전해지길 원한다면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완전하게 이웃 사랑을 실천했다고 해도, 그에 대한 결과로 영생이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부자 청년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고자 하신 것일까요?




"네가 선한 일을 해서 이웃 사랑의 계명을 다 실천했다고 하는데, 이웃 사랑의 계명을 완전하게 실천하려면 네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어야 해.



그런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영생을 얻는 것은 아니야. 그런 후에 와서 나를 따라야 해."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자 청년이 생각하는 선한 일로는 영생을 얻을 수 없고,



심지어 그가 자신의 모든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준다 해도 그것으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로 와야, 예수님을 따라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길고 자세하게 이야기 했지만, 예수님과 부자 청년의 대화의 요점은 이것입니다.





”사람이 선한 일을 한다고 해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데,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하게 지킨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께로 와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영생은 사람의 선한 일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주어지는 것이다.



모든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준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사는 것이다. 예수님을 얻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




이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시대의 랍비들의 가르침과 유대인들의 상식과 제자들의 가치관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 충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매우 놀라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25절)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을 찬찬히 보시며 대답하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26절)





영생을 얻는 것,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구원을 얻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고, 사람의 어떤 선한 일도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큰 부자라 해도 그 가진 것을 다 팔아 영생을 살 수는 없습니다.



구제를 많이 하고, 기부를 많이 할 수 있게 하는 부도, 그런 일들을 하나도 할 수 없게 하는 가난도, 구원의 조건이 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자나 가난한 자를 구원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돈을 사용한 선행으로 영생을 얻고자 하는 부자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예수님께로 와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누구보다도 이것을 잘 실천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베드로는 선행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대한 보상을 알기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에 대한 엄청난 보상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첫 번째는 ’새롭게 된 세상에서‘ 주어질 보상입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이 보상은 인자가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그분의 왕권과 통치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란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고, 성자의 영광으로 돌아가셔서 성령님을 파송하실 때를 가리킵니다.





이때부터 예수님은 몸된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교회와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교회를 통치하시되 사도들을 통해서 ’새 이스라엘‘이 된 교회를 통치하십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대리 통치권자로 임명되어 교회에 바른 가르침을 주는 사람들이 됩니다.





이로부터 주님의 교회는 사도적 가르침을 따르게 됩니다. 사도적 가르침을 따르는 교회는 세상의 심판자 역할을 하게 됩니다(고전 6:2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사도들처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상을 심판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두 번째는 제자들이 버린 것과 관련된 보상입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제자들이 버린 소유의 목록에는 재물(집, 밭)과 가족 구성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제자들이 버린 것의 몇 배로 보상해 주십니다. "여러 배"의 헬라어 단어인 '헤카톤타플라시온' "백배"(NIV)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버린다‘는 의미는 쓰레기를 버리듯이 버린다는 의미보다는, 모든 소유의 권리를 내가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께 돌려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자식을 어떻게 버릴 수 있겠습니까?



자식을 내 소유라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재물의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과 의도에 맞게 사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에게 몇 배의 보상이 있을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내 자식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께 돌려 드린 사람은, 내 자식만 자식으로 여기지 않고 많은 아이들을 내 자식처럼 생각하고 돌보게 됩니다. 영적 부모..





내게 있는 소유를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맡기신 것이라고 생각할 때, 내 재산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게 됩니다.



역설적이게도, 버린 사람이 더 얻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보상을 뛰어넘는 가장 결정적인 보상을 제공하시는데, 그것은 곧 영생입니다.





예수님의 표현으로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23절)이고, 제자들의 표현으로는 ’구원을 얻는 것‘(25절)입니다.




이로 볼 때, 주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다 팔라고 하신 것은 그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함이요, 그가 버린 것보다 더 주어서 그것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함 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이렇게 반문하실 것입니다.



”다 알겠는데요,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부자가 되어도 된다는 말씀인가요, 아니면 부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인가요?“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부자가 되라, 되지 말라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씀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다만 자신이 소유한 돈으로 행하는 선행의 댓가로 영생이 주어진다는 생각을 경계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돈으로 선행을 행하고 그로 인한 댓가로 영생을 얻는다면, 그 사람에게 예수님은 전혀 필요가 없는 분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필요치 않은 사람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요 14:6절, 행 4:12절).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 모든 소유권을 옮긴 사람은 소유하지 않았지만 부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몇 배로 맡기시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몇 배의 집, 밭을 맡기시고, 그에게 몇 배의 형제 자매, 부모 자식을 맡기십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앞 부분을 읽어보면 사도들에게 이런 일이 그대로 일어나고 있음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그대로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그런 점에서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고, 누구나 부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우리에게 맡겨 주셨고, 더불어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청년이 그토록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 그의 공로가 아니라 부모의 유산 때문이었듯이,



우리가 부자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돈을 많이 벌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유산을 물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이미 부자입니다.




그래도 누군가는 집요하게 물을 것입니다.



”아, 그런 것은 알겠는데요, 그런 영적인 의미의 부자 말고, 진짜 돈 있고 재산 있는 부자가 되면 안되나요? 그리스도인들은 돈은 없고 마음만 부자로 살아야 하나요?“




저는 부자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라 뭐라고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도 얼마든지 부자가 될 수 있고,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부자의 정의에 따라 다르겠지만요.




하지만, 성경이 경고하는 부자의 위험성은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①먼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주신 교훈대로, 내가 돈으로 행한 선행은 나의 공로가 아니고, 오직 한 분 선하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선행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을 잊지 않고 행하는 선행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권장하시는 선행이 될 것입니다.




②다음으로,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6장 10절>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말씀합니다.





돈을 더 많이 얻으려다가 진실한 믿음에서 떠나고, 오히려 더 큰 근심과 고통만 당하게 된다고 경고하십니다.



돈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다스림의 대상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③또한, <잠언 23장 4,5절>은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잠언 30장 8,9절>을 보십시오.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이 밖에도 성경에는 돈이나 부에 대한 말씀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분명한 것은 부가 죄나 의가 아니고, 가난도 죄나 의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부할 수도 있고, 가난할 수도 있습니다. 부하다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도 아니고, 가난하다고 하나님께 무시 받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아신다고 말씀합니다(마 6:24-35절).




우리는 돈으로 베푼 선행으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돈이 없어 선행을 베풀지 못했다고 영생을 얻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영생은 오직, 선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심으로 얻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따름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우리는, 마치 부모의 유산을 아무런 댓가 없이 받아 부자가 된 청년처럼, 예수님의 공로로 하나님의 나라를 유산으로 받아 부자가 됩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누구나 부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는 부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부자처럼 베풀고, 부자처럼 선행을 행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는 탐욕에 지지 않는 부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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