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 축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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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7일 맥추 감사 주일 설교 -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의 공로로 바꾸지 말라 (마 20:1-16절)(12절)
 이기남    | 2024·07·06 09:48 | HIT : 11 | VOTE : 0
* 설교 -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의 공로로 바꾸지 말라 (마 20:1-16절)(12절)





동일한 조건에서 일을 많이 한 사람은 많은 보상을 받아야 합니다.



하루 12시간 일한 사람은 6시간 일한 사람보다 임금을 많이 받아야 합니다.



또한, 먼저 와서 경력을 많이 쌓은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세상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많이 일한 사람일수록 더 많은 보상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베드로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마 19:27절).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을 때, 베드로는 형제 안드레와 함께 갈릴리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셨고, 그들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마 4:20절).





‘그물’은 어부인 그들의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물을 버렸다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린 것과 같았습니다.




많은 재산 때문에 슬퍼하며 예수님을 떠나간 부자 청년(19:22절)과 달리,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첫 번째 제자였습니다. 마태복음에서 보면.





그는 가장 먼저 천국에 들어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누구보다도 많은 보상을 받아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가 받을 풍성한 보상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19장 28,2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하지만 경고의 말씀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19장 3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그리고 오늘 본문 <20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또한, 예수님은 이 비유를 끝맺으면서 <16절>에서 다시 한번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의 비유를 말씀하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포도원 일꾼의 비유 이야기를 통해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또한 우리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지금은 첫째인 베드로가, 더 나아가 예수님께 먼저 온 제자들이, 나중에 꼴찌가 되는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고를 주시기 위함이 아닐까요?




다시 한번,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베드로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사람들 중에서,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이 세상 나라와는 달리, 천국은 자신의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찾으려고 아침 일찍 나간 주인과 같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주인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포도원 주인과 같다면,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주인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보기 힘든 포도원 주인과 같기 때문에,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에서 크게 2가지 점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우선, <1절>에서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다"고 하셨으니까, 비유에 등장하는 주인의 특징에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먼저 된 자가 왜 나중이 되는지 그 이유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나중 된 자가 먼저 된 이유도 알게 될 것입니다.





자 그럼 먼저, 포도원 주인의 특징에 집중해서 비유의 말씀을 살펴 보겠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자신의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찾고 있습니다. 일꾼을 찾으려고 아침 일찍 시장에 나갑니다.





일반적인 포도원 주인은 직업 소개소를 통해서 일꾼을 구하는데, 이 주인은 시장에 직접 나가서 일꾼을 구합니다.



아마도, 이 주인은 일꾼들이 소개소에 지불 할 소정의 소개료에도 신경을 쓰는 것 같습니다.





아침 일찍 나와서 구한 일꾼들에게 주인은 하루 품 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하고 포도원으로 보냈습니다.




주인의 행동을 계속해서 따라가 보겠습니다. 주인은 아침 9시쯤에 다시 시장에 나갑니다.



아침 9시면 인력 시장은 이미 파하고 좀 지난 시간입니다. 일꾼들은 다 흩어지고 없을 시간입니다.





그런데 그 시간에 주인은 아직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빈둥거리며 서 있는 몇몇의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주인은 이들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4절) 약속하며 그들을 포도원으로 보냈습니다.




주인은 낮 12시와 오후 3시에도 시장에 나갔고, 그곳에서 빈둥거리는 사람들을 보았고, 그들에게도 똑같이 말했습니다.




주인은 심지어 오후 5시쯤에도 시장에 또 나갔습니다. 그 시간에도 빈둥거리며 서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주인은 그들에게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6절) 물었습니다.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7절)




왜 아무도 그들에게 일자리를 주지 않았을까요? 불경기가 닥쳤기 때문일까요?



아마도 그들은 노동력이 상당히 저하된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꾼으로 쓰기에는 합당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 일당을 주고 일자리를 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또다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7절)




세상의 상식으로는 이런 주인의 행동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6시가 일을 마치는 시간인데, 5시에 일꾼들을 포도원에 들여보낸다는 것은 일을 시키겠다는 것인지 말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행동입니다.





일반적으로 포도원 주인들이 일꾼들을 포도원에 들여보내는 목적은 단 하나, 그들의 노동력을 사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이 주인은 아무도 고용하지 않는 저급의 노동력을, 그것도 한 시간만 사기 위해서 그들을 포도원에 들여보냈을까요?





오로지 노동력 만을 원하는 주인이었다면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주인이 5시에, 아무도 고용하지 않는 사람들을 포도원에 들여보낸 것은 전혀 다른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 주인의 의도는 해가 저물고 하루 일과를 마감할 때에 이르러서야 드러났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관리인에게 마지막에 온 일꾼부터 맨 처음에 들어온 일꾼까지 품 삯을 주라고 말했고, 오후 5시에 고용된 일꾼들이 와서, 각각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습니다.





주인이 그들에게도 온전한 하루 품 삯인 한 데나리온을 주라고 한 것입니다.





주인이 오후 5시에도 일꾼들을 포도원으로 들여 보낸 것은 그들에게도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주기 위함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주인은 하루 품삯을 주기 위해서 한 시간을 고용한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주인이 있을까요? 이런 주인을 만난 일꾼들은 얼마나 행운아일까요?



그들은 주인이 베푼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비유에 등장하는 포도원 주인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 혹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찾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로 혹은 천국의 일꾼으로 부른다는 의미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19장>에서 제시된 ‘영생’, ‘천국에 들어가는 것’, ‘구원을 얻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아침 일찍에도 나오고, 9시, 12시, 오후 3시, 오후 5시에도 시장에 나와 일꾼을 찾은 포도원 주인처럼, 구원 받을 자들을 찾고 또 찾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찾으시고 부르시는 단 한 가지 이유는 그들에게 ‘한 데나리온’ 즉 영생, 천국, 구원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누구에게나 구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구원을 얻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리고 언제든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예수님께서는 천국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인생의 새벽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인생의 황혼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도 구원을 주십니다.





새파란 청년의 때에 구원을 원하는 사람을 불러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기력이 쇠하여 임종을 앞둔 사람에게도 원하기만 하면 구원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예수님의 비유의 핵심에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의 요점은 맨 처음 고용되었던 일꾼들의 반응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맨 처음에 고용되었던 일꾼들이 왔습니다.



그들은 오후 5시에 고용된 사람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보면서, 내심 더 많은 품 삯을 받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한 데나리온만 주어졌습니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컸습니다. 실망은 금새 주인에 대한 원망과 불평으로 바뀌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쉬운성경) "저 사람은 겨우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 하루종일 뙤약볕 아래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취급하는군요."





이들의 불평을 들어 보십시오. 한 데나리온 받은 것 때문에 불평하는게 아닙니다.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들과 하루 종일 뙤약볕 아래서 수고한 자신들을 주인이 똑같이 취급했기 때문에 불평합니다.





그들은 ‘하루 종일’, '뙤약볕 아래서‘, ’수고‘ 했다는 자신들의 노동 행위를 내세웁니다.




이들이 처음부터 이런 생각을 했을까요?



처음에는 오히려 반나절이 아니라, 하루 종일 일하게 된 것, 그로 인한 정당한 보상으로 한 데나리온의 일당을 받게 된 것만 해도 다행이며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일하게 된 것만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품삯을 받게 된 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나 오후 5시에 온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이들은 자비로운 주인이 눈에 거슬리고, 주인의 행동이 부당하다고까지 생각하게 되어 불평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받은 한 데나리온은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수고한 것에 대한 당연한 대가라고 생각했고, 오히려 그보다 더한 대가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자비로운 주인을 무자비한 주인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한 데나리온을 주기 위해 새벽부터 일꾼을 찾았던 주인의 선한 의지를 불의한 것으로 치부해 버렸습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쉬운성경)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오? 내가 자비로운 사람이라서 당신의 눈에 거슬리오? 그러므로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포도원 주인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핵심에 도달했습니다.





은혜로 받은 것을 자신의 공로로 바꾸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비가 눈에 거슬리게 되고, 그 사람은 첫 번째로 왔지만 꼴찌가 되고, 먼저 왔지만 나중 된 자가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서 첫 번째로 경고를 받아야 할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사도 베드로 입니다. 그는 제자들 중 첫째 입니다. 적어도 마태복음에 의하면, 제자들 중 가장 먼저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그 자신이 말한대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19:27절). 그가 버린 것에 비교할 수 없는 보상을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현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남보다 많이 포기하고 수고할 때, 그에 비례하여 하나님께서 보상을 해주실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가 소유를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것은 천국 그 자체를 소유하기 위해 기쁜 마음으로 하는 것이지, 그 외의 어떤 보상이나 지위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만약 베드로가 그런 마음을 버리지 않는다면, 그는 결과적으로 천국의 가치를 훼손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 베드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지만, 만약 그가 예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비유에 등장하는 맨 처음에 고용된 일꾼들처럼 되었다면 주님의 교회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베드로는 교회에서 왕처럼 군림했을 수도 있습니다.



첫 번째 온 사람이라는 특권을 내세우며 온갖 특혜를 누리고자 했을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의 교회가 건강하게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베드로와 사도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지만,



천국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많은 일을 한 사람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정작 그러한 잘못된 기대로 말미암아,



마지막 때에 하나님 앞에서 보잘 것 없는 자, 나중 된 자로 드러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에 반해서, 비록 가진 것이 많지 않아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지 못했고, 늦게서야 예수님을 믿게 되어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그렇게 많이 수고하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자신이 포기한 소유와 희생한 수고가 천국의 가치에 비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가를 인정하고 사는 사람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 앞에서 ‘첫째’, 높은 자로 인정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목격한 사도들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서를 읽어보면 완전히 달라진 사도 베드로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겸손하게 자비의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지 주옥같은 권면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벧전 2:17절)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4절)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9절)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벧전 5:3,4절)




우리는 사도들에 비하면 한 참 늦게 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뒤에 올 수 많은 사람들에 비하면 먼저 온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나중에 온 사람이든, 먼저 온 사람이든, 하나님 나라에서 첫째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자비를 항상 인정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의 공로로 바꾸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인정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버리고 수고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그러니 주님을 위해서 버리고 수고한 것이 많다면 그 자체로 감사하고 기뻐할 일입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이 별로 없어서 주님을 위해 버리고 수고한 것이 적다고 해서 불의한 생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비를 베푸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산다면 그 또한 감사할 일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시고, 자비하신 분이심을 믿고 사는 것이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믿는다면 나에게 베푸신 것은 모두 은혜요,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신 것은 모두 감사할 일입니다.




정작 하나님 나라를 위해 정말 수고한 사람은 수고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위해 정말 희생한 사람은 희생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자체가 감사이고,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헌신한 것을 기뻐하고, 다른 사람이 헌신하는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유명한 고백을 기억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비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우리가 주님을 위해 버린 것은 적고, 주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한 것은 아니더라도, 마지막 날에 천국에서 첫째로 인정해 주실 주님을 바라보며 감사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부르신 하나님은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나에게 자비로우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이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나에게 베푸시는 자비에 감사하고, 다른 사람에게 베푸시는 자비에 기뻐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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