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 축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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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6일 주일 설교 - 기도 외에는 (막 9:14-29절)(29절)
 이기남    | 2021·06·05 11:45 | HIT : 126 | VOTE : 1
* 설교 - 기도 외에는 (막 9:14-29절)(29절)


1. 영적 무관심..

<요한계시록 2,3장>에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과 칭찬과 권면」이 나옵니다..

그 중의 한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내용을 하나 확인해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7절>을 보십시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결정적인 문제는 「자신에 의해서 자신이 스스로 속았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속는 것만큼 비참한 것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도 그와 같습니다.. 대단히 화려한 미래를 꿈꾸며 스스로 부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상 그 내면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 먼 상태로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 시대의 모습에 대해서도 「예수님의 진단」은 매우 단호하고 분명합니다..

<마태복음 24장 37-39절>을 보면, 주님은 마지막을 향하고 있는 모든 시대를 「노아의 시대」에 비유하셨습니다..


「노아 시대의 특징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영적 무관심」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쉽게 여겼고, 영적인 것에 무감각 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감각이 무뎌져서 하나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현재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즐기는 데에만 온 마음을 쏟았습니다..

이것이 「마지막 시대를 진단하시는 예수님의 지적」이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무감각의 어리석음」을 지적하신 주님은, 이 마지막 때의 결정적인 문제도 역시 「영적 무감각」, 「영적 무관심」이라고 지적하십니다..


저는 특별히 「어떤 신령한 영적 능력을 받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시대를 꿰뚫어 본다든가, 사람을 보면서 그의 앞날이 어떻다든가 하는 예언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를 놓고, 이 땅을 놓고, 이 땅의 젊은이들을 놓고 「이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해야 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할 때」, 숨막히게 밀려오는 답답함이 있습니다..




정말 이것은 견딜수 없는 답답함 입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하는지, 저 사람에게 무슨 말을 시작해서 어떻게 이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그가 죄인이며, 그가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며, 그가 영적으로 살아야 할 이유」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 것인지, 답답함을 느낍니다..


어떤 때는 「이미 기존의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바라 보면서도 「도대체 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을 해 줘야 다시 영적인 감각을 찾게 해 줄 수 있을까, 찾는 것은 둘째치고 영적인 감각이 필요하다는 것을 어떻게 인식시킬 수 있을까」 하는 답답함이 있습니다..







「목회자의 눈」으로 볼 때, 이 사람의 문제는 「영적인 문제」인데, 들고 나오는 문제는 늘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목사님.. 어떻게 하면 돈 좀 벌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좀 건강하고 편하게 살 수 있을까요..」 이런 것들을 묻습니다..


지금 이 사람의 문제는 이게 아닙니다.. 돈 좀 벌고 못 벌고, 장이 조금 안좋고 좋고.. 이런 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런 몸 아픈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도대체 이 사람에게 「하나님이 매일 필요한 분이심을 어떻게 말해줘야 합니까?」







문제의 핵심을 말해 주려고 해도 핵심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아직도 「자기 자신」에 똘똘 뭉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 땅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영적인 무관심」입니다.. 「영적인 무감각」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대로 「노아 시대의 사람들의 모습」은,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심판과 종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마지막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비를 통한 심판을 말할 때 비웃었고, 노아가 산 위에서 배를 만드는 것을 업신여겼습니다..

심판이 없다고 생각한 그들은 극단적인 방탕과 타락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무감각」은 바로 오늘 이 시대 사람들과 너무나 똑같습니다..




「현재의 삶에 몰두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더이상 「역사의 끝과 심판」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절대로 인류의 파국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확신은, 「제한된 시간의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의 삶」을 쾌락과 잘못된 목적에 낭비하게 만듭니다..


「노아 시대의 핵심적인 문제」가 「영적 무관심과 영적 무감각」이었던 것같이, 「이 시대의 핵심적인 문제」 역시, 부족한 기술력이나 부족한 자본이나 부족한 과학적인 능력이 아니라 「영적인 문제에 대한 무관심과 무감각」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인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물질의 문제, 건강의 문제, 아니면 인간 관계의 문제라고 생각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진짜 문제는 「영적인 감각이 무뎌진 것」입니다..


2. 기도 외에는..

<마가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 셋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곳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형되었고, 모세와 엘리야가 영원의 세계에서부터 다시 나타나는 「초자연적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산은 상상속에서 만든 산이 아니고 자연의 세계 속에 있는, 진짜 산입니다..




자연의 산이었지만 그 자연 속에 초자연의 역사가 임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변형되셨고, 모세와 엘리야가 거기에 왔습니다..


이 「변화산의 사건」은 「주기도문」, 즉 「기도의 아주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변화산은 자연의 산이지만, 여기에 초자연적인 영적인 세계가 임했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기도」란 「제한된 이 땅의 문제들」이 「영원의 세계로부터오는 하늘의 능력」과 만나서 「문제의 해결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이 땅의 어려운 많은 문제들」, 특히 「이 땅의 가장 큰 문제」가 뭡니까? 「죄」입니다..

죄와 그로인해 비롯된 수 많은 문제들이, 우리가 「기도하는 동안」 그 기도를 통해서, 「하늘의 능력과 하늘의 자원」으로 해결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지 않는 것」은 「가장 인간답지 못한 것」입니다..




뒤집어서, 「인간의 가장 인간다운 모습」은 무엇입니까?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제한된 존재입니다.. 죄와 사망과 심판과 지옥의 길을 갈 수 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제한된 인간의 가장 인간다운 모습」은 무엇입니까?

「영원을 이 땅으로 가져오는 삶」, 「기도하는 삶」이 「인간의 가장 인간다운 모습」입니다..


바로 이것이 변화산 입니다.. 이 산은 자연의 세계입니다..




이 자연의 세계에 「초자연이 임하고, 하늘과 땅이 만나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변화산 위의 세계」는 말 그대로 「땅 위에 임한 하늘의 모습」이었습니다..


<땅에 있는 하늘의 모습..>

우리는 기도할때마다 「이 땅 위에 하늘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기도」는 어떤 우리의 공로를 쌓는것도 아니고, <새벽기도를 몇년간 했다, 40일 금식 기도를 했다..> 이런 것들을 자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는 「나는 기도했는데, 넌 안했지.. 내가 너보다 낫지...」 뭐 이런 이야기도 아닙니다..


「기도는 이 땅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로인해 이 땅에 하늘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세계가 임하는 통로, 이것이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 「변화산 아래」에는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귀신들려서 고생하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이 아이를 붙잡고 고치려고 씨름하고 있었지만 고치지 못했습니다..







이 산 아래의 모습을 <마가복음 9장 17,18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이러한 「산 아래의 세계」는 「변화산 위의 세계」와는 너무나 대조적 이었습니다..




변화산 위에는 지금 「이 땅에 하늘이 임했습니다..」 「자연의 산에 초자연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땅 밑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한 아버지가 고침을 받으려고 귀신들린 자기의 아이를 데리고 제자들에게 왔지만 제자들이 이것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이 사라진 땅의 현실」입니다..


이 두 가지의 확연히 구분되는 사실을 가지고 다음 단계로 나아 가겠습니다..

산 아래의 아홉 명의 제자들이 실수를 하긴 했지만 그런 중에서도 잘 한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왜 귀신을 좇아내지 못했는가」의 원인을 예수님께 물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행 중에도 「좋은 신앙의 자세」입니다..

이 정도의 신앙만 되도 사실은 괜찮은 신앙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런 「질문 자체를 안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막 9:28절)

이 때에 예수님은 뭐라 하셨습니까? 주님의 대답은 매우 간단했습니다..


산 위에서는 이 땅에 초자연이 임했습니다..

「산 위에는」 그곳이 이 땅이지만 그냥 「자연의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땅」입니다.. 그러나 「산 밑에서는」 「자연의 땅」이 「그대로의 땅」인 것입니다..


이 땅에 귀신들린 일이 일어났지만, 아무도 조치를 취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원인을 뭐라고 하셨습니까? <마가복음 9장 29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풀어서 말하면.. 「제자들.. 너희들이 기도했다면, 이 산 아래도 비록 자연의 땅이지만 초자연이 임했을 것이다..







결국 기도했다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신적인 능력, 하늘의 능력이, 하늘의 역사가 이 땅에 임했을 텐데.. 너희들이 기도하지 않아서 이 병이 고쳐질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에 관한 가장 중요한 핵심」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예수님의 이 말씀의 뜻」은 이런 뜻입니다..

「여기 고통하는 땅의 현실이 있습니다.. 벙어리 귀신들린 병자가 와서 고통을 호소합니다.. 그런데 이 땅의 문제는 하늘과 연결되어야만 풀립니다.. 마치 변화산 위에서 일어난 역사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이 땅의 문제와 하늘의 능력을 연결하는 것이 뭡니까? 기도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기도없이 땅의 문제를 풀려 한 것입니다..」


「영적인 무감각」이란 뭘 말합니까?

「하늘의 역사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초자연적 역사가 나에게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인 무감각입니다..


그 중 하나의 내용이 <마가복음 9장>의 내용인데, 이 내용은 결국은 「이 땅에 고통하는 현실이 있지만, 제자들조차 이 땅의 문제를 하늘과 연결해서 기도하며 풀어나가지 않았고, 결국은 문제를 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로인해 「이 땅은 영적인 무감각으로 그대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단순히 기도가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명령의 순종의 차원에서 그냥 하는 것이 아니고, 공로를 쌓기 위해 하는 것도 아니고, 「이 땅의 자연의 삶을 초자연의 삶으로 바꿔 놓는 것」입니다..






「땅의 제한된 자원에 하늘의 능력이 임하게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사람이 일을 하면 그냥 사람이 일을 하는 것이지만, 사람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기도는 「기도를 통해서 이 땅에 하늘의 역사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기도없이 땅의 문제를 풀려고 한 것입니다..




여기에 제자들의 실수가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결정적인 실수는 「땅의 문제를 땅의 제한된 자원으로 해결하려 하였다는 것」입니다..


3. 성령님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형상으로 지으시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하시고」, 「끊임없이 성령님을 우리 가운데 부어주십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기도의 응답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님」입니다.. <누가복음 11장 13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의 가장 좋은 선물」이 무엇입니까? 「성령님」을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주시는 가장 큰 선물」은 「성령님」이십니다..




기도하는 자가 「성령님으로 충만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소유」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풍족한 영적 감각을 가지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기도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강청 기도」입니다..



<뭔가 구하는 것이 있으면 강하게 요청하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다 주실 것이다..




그러니 많은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약점을 잘 파고들어서 강하게 많이 요구하고 응답을 받아내야 한다..




꼭 달라고 해야 할 것을 모른다거나 또 요청을 하지 않아서 못 받아내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고, 잘 연구해서 많이 강하게 요구하라..>






오늘날 이 땅에는 이런 투의 기도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브루스 윌킨슨>(Bruce Wilkinson)의 『야베스의 기도』입니다..



독일의 신학자로 기도에 대해 깊이 연구해온 「빌헬름 패」(Wihelm Faix)는 「이 책이 갖는 문제점」을 <5가지>로 정리하여 지적하고 있는데, 한 마디로 말하면 <기도가 투자>라는 것입니다..






「첫째, 기도의 기계화 / 30일 동안 매일같이 이 기도를 하면 기도가 끝날 즈음엔 분명한 변화를 알게 된다는 저자의 주장은 기도를 자동화시킬 위험이 크다..



둘째, 단계적 사고 / 이 기도를 계속 해 나가면 우리의 축복이 증가하는, 보다 높은 단계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 이를 뒷받침 한다..





셋째, 기도의 응답은 믿음의 필연적인 결과라는 주장 / "당신이 믿고 그 믿는 바를 실천에 옮기는 것만이 하나님의 능력을 방출하여 여러분의 삶 속에서 변화를 야기할 수 있다"는 말은 이러한 사고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내가 간구한 대로 이루어 지지 않을 때 그것은 내가 올바로 믿지 않고 있다는 증거인가?





넷째, 응답받지 못하는 원인을 죄에서 찾음 / <충만한 삶의 순환 작용을 저지하는 것은 죄>이고 <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은 여러분의 삶에서 방해를 받는다>는 주장은 정당하다.. 그러나 이것의 과도한 강조는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의 원인을 인간에게만 돌리는 위험성이 있다..



다섯째, 신앙의 행위화 / 기도의 응답을 지나치게 신앙에 붙들어 매면 그 신앙은 인간의 공로가 된다.. 즉 하나님의 축복을 얻기 위한 인간적 수단이요 행위가 되고 마는 것이다..」




기도하면 뭐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늘이 이 땅에 임하고」, 하늘의 능력이 절실히 필요함을 가장 잘 아는 성령님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모든 것을 영적으로 바라볼 수 있고, 영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내가 바뀌는 것, 그것이 기도입니다..

기도하면 할수록 성령님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하늘의 신령한 능력으로 이 땅의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복」은 「깨달음」이 「복」입니다..

살다보면 자녀가 귀찮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러다가 자녀가 아파보십시오..




우리가 얼마나 안타깝게 애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합니까? 그러면서 이 아이의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생의 우선순위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입니다..


기도는 기도하면 성령님을 선물로 받고, 그 성령님의 눈으로 모든 것을 다시 평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입니다..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 보다, 거지가 된다고 해도 하나님의 필요를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면, 그것이 복입니다..」








그런면에서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다 좀 부족한 것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부족한 것으로 인해 영적인 감각이 회복된다면 제일 좋겠습니다..






브루스 윌킨슨의 『야베스의 기도』는 뭐라고 합니까? 이 책을 요약해 보면 한마디로 「기도가 투자」라는 것입니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이런 식의 기도에 익숙해 지면 「영적인 감각」을 회복하기가 아주 아주 어려워 집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제가 우리 성도님들에게 기도 제목을 내어 달라고 합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성도님들을 위해서 기도하려는 저의 목회의 일환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 이 성도가 영적인 감감이 있는가.. 영적인 상태가 어느 정도인가..」를 알아 보기 위한 것입니다..


기도 제목을 보면 그 사람의 영적인 상태를 거의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능력을 받아서 아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기도는 어떤 것도 기도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은 영적인 지도자에 의해서 파악이 됩니다..


저의 간절함은 우리들의 기도가 「정말 성령님을 선물로 받는 것인가, 또 주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 바뀌어 가는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예배에 기도회에 모임에 교회로 달려 나온다면 저는 박수를 치겠습니다.. 그러나 「투자의 일환으로」 기도하러 나온다면, 사실 안 나와도 괜찮습니다..


「기도는 기도하면 할수록 뭐가 가장 중요한지를 알게 됩니다..」


「산 밑에 있는 제자들의 문제」는 비단 제자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하늘은 없이 땅만으로 삶의 목적과 의미를 찾으며 이 땅을 살고 있는 바로 우리들 모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산 밑에 있는 제자들의 모습」은 「하나님의 일하시는 것」 없이, 즉 「인간들이 일하는 것」만으로 미래를 이루겠다고 하는 오늘날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변화산 아래의 동네에 살면서 그 위의 세계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연의 땅에도 하나님의 초자연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산 위에서」는 보여주고 있는데, 「산 밑에서」는 그런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여전히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서로 물고 뜯고 뺐고 찢고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한된 존재가 제한된 땅에서 땅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니까, 다른 사람의 것을 많이 가져와야 되고, 속여서라도, 사기를 쳐서라도 저 사람의 것을 내 것으로 가져오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한된 이 땅의 사람들이 하는 짓입니다..


오늘날 인간공동체는 그것이 정치든 경제든 사회일반 노동의 문제든 국제 외교의 문제이든 다 마찬가지 입니다..




「인간 공동체는 땅이 사는 길을 하늘과 분리하는 것에서 찾고 있습니다..」






모두 다 「하늘이 개입되지 않는 상태」에서 뭔가 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고사도 드리고 별짓을 다 하지만 모두다 무익한 일입니다.. 인간끼리 해결하려 하니까 복잡하고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해야 합니까? 「기도로 주님께 열어드려야 합니다..」


「기도로 하늘을 여는 순간」 「위로부터 쫘악 쏟아지는 성령님의 은사들」을 얼마든지 받아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성령님의 열매들을, 영적인 풍성함을 맘껏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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