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 축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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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20일 주일 설교 - 예수님께 기대를 가지라 (요 6:1-21절)(9절)
 이기남    | 2021·06·19 10:08 | HIT : 136 | VOTE : 1
* 설교 - 예수님께 기대를 가지라 (요 6:1-21절)(9절)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네개의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이 기적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잘 보여주는 중요한 기적, 즉 표적이란 의미입니다..







요한복음에서의 표적(세메이온)은 단순히 예수님의 놀랍고 신비한 능력을 보여주는 기적(miracle, 두나미스)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에서의 표적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드러내 보여주기 위한 계시입니다..







그렇다면 오병이어의 표적이 드러내 보여주시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오늘 본문은 <6장 1-71절>까지 이어지는 긴 말씀의 앞 부분입니다..




<6장>의 말씀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뒷 부분에 이 표적의 진정한 의미가 해설되어 있습니다..




앞 부분에는 표적 사건, 뒷 부분에는 그 표적에 대한 의미를 해설해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뒷 부분에 제시된 <예수님은 누구신가?> 라는 질문의 답을 염두에 두면서, 이 시간에는 앞 부분의 「오병이어의 표적」만을 중심으로 말씀을 선포하겠습니다..





오병이어의 표적은 누가 보이셨습니까?




<1절>에 보면, 예수님이 가장 먼저 등장합니다.. <3절>에 보면, 이 예수님과 함께 제자들이 나오고, <2절>에는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병든 사람들에게 행하신 표적을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랐습니다(2절)..




이들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떡과 물고기를 먹게 됩니다..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이신 때는 언제입니까?




<4절>에 보면,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 무렵이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먼 옛날 모세의 인도로 애굽을 탈출할 때, 어린 양을 잡아서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집을 <장자를 죽이는 사자>가 건너 뛰었던 날을 기념한다고 해서 유월절(Passover)입니다(출 12장)..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해방과 하나님의 구원을 기념하는 매우 중요한 유대인의 명절>입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이 유월절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중 두 번째로 맞이하는 유월절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유월절에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신 어린 양(요 1:29절)으로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십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이신 장소는 어디입니까?




<1절>은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건너편이란, <17절>을 볼 때, 가버나움을 기준으로 건너편 곧 벳세다라는 지역입니다..




<3절>은 좀 더 구체적으로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셨다>고 말씀합니다..







먼 옛날 모세는 여호수아를 데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새긴 돌판을 다시 받기 위해 시내산을 올랐지만, 이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사람들에게 친히 생명의 양식을 먹이시기 위해 산에 오르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의 표적을 왜, 그리고 어떻게 행하셨습니까?





이에 대한 대답이 <5-13절>까지 길게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표적을 왜, 그리고 어떻게 행하셨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빌립에 대한 예수님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예수님께 나오는 것을 바라보시고 빌립에게 물으셨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예수님께서 특별히 빌립에게 이 질문을 하신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 벳새다라는 동네에 있었고, 빌립은 바로 그곳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요 1:44절)..







그런데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질문하신 것은 단지 그런 의미만이 아니었습니다..




<6절>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특별히 이 질문을 하신 것은 <빌립이 어떻게 하나 보시려고>, 즉 그를 시험(test)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것이 오병이어의 표적을 행하신 이유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예수님은 분명히 빌립이 어떻게 하나 보시려고, 빌립을 시험하기 위해서 오병이어의 표적을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6절>을 보면,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이 어떻게 반응할지를 이미 알고 계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하실 것인지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알고 계신대로, 빌립은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7절)







빌립의 대답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처한 현실을 매우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쉬운 성경)은, <여기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빵을 한 입씩만 먹는다고 해도>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허기진 사람들이 떡을 한 입씩만 베어 먹고는 너무나 아쉬워하면서 실망하고 돌아서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들을 배불리게 하기는커녕 한 입씩 먹고는 아쉬워 해야 하는데 필요한 떡을 사는 것만해도 200 데나리온(노동자 이백일 품삯)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 빌립의 계산입니다..





「2021년 현재, 대한민국 최저 시급 8,590원(x8x200)으로 계산하면 13,744,000원어치입니다..」








한 입씩만 베어 먹고는 아쉬워해야 하는 양의 떡을 사는데도 그 큰 돈을 드려 사야 합니다.. 그러니 그들을 배불리 먹이려면 그 떡을 사는데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하겠습니까?








제자들에게는 그 많은 돈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더구나 벳새다 마을 구석구석의 떡 가게를 다 아는 빌립은, 설사 그 많은 돈이 있다 해도, 그 어디서도 떡을 살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빌립에게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빌립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입니다..







그가 처음에 예수님을 만났을 때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요 1:45절)







그 후로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그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여러 가지 표적을 보았습니다..




<2절>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온 이유도 병든 사람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뭔가를 기대하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빌립은 예수님의 제자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답 속에는 예수님께 대한 기대가 전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는 이 상황에서 예수님께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는 사람이 예수님께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다니요!!




예수님께 대한 기대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는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현실에 압도를 당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미 빌립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알고 계셨는데, 왜 그를 시험하셨을까요?




현실적인 계산은 빠르지만, 늘 그 계산 속에 예수님께 대한 기대를 빼놓는 빌립, 이 문제를 아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빌립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질문 속에 힌트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5절) <어디서>를 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 빌립은 예수님의 강조점을 놓쳤습니다.. <사야한다>는 생각에 꽂혀서 떡을 살 돈만 계산했습니다.. 그 계산의 결론은 <먹일 수 없다> 였습니다..







예수님의 시험을 통해서 제자로서 빌립의 치명적인 약점이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빠른 계산 속에 항상 예수님에 대한 기대를 포함시켜야 함을 이 시험을 통해서 깨닫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시험은 빌립을 돕기 위한 시험이요, 빌립을 가장 잘 아는 주님께서 그를 제자로 키우기 위한 시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때로 사람을 시험하십니다!!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빌립을 아셨던 것처럼 우리를 잘 아시고, 우리에게 가장 적절한 시험을 하십니다..




물질에 집착하는 사람은 물질 문제로, 사람에 자주 매이는 사람은 사람 문제로, 때론 인간 관계 문제로 시험하십니다..




그러나 그 시험은 사랑의 시험이요, 은혜의 시험입니다..







예수님은 빌립처럼 우리가 어떻게 하실 것을 이미 아시고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우리가 시험에 실패할 것을 아시면서도 시험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실패란 없기 때문입니다.. 실패조차도 은혜요, 실패조차도 예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빌립이 사람들을 먹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먹이신 것처럼,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국 자신이 할 것이지만,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을 아시기에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해결 받아야 할 문제를 드러내시고, 그 문제를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시험은 우리의 영적 성장에 매우 유익합니다.. 현재 주님은 우리 각자에게 빌립에게 주신 것처럼 시험 문제를 주신 것입니다..







또한 코로나 19 팬데믹 시대에 한국 교회를 시험하십니다.. “이 사회에 교회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




우리는 이 시험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고민합니다.. 우리는 이 시험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문제의 해답이 주님께 있고, 주님이 그 문제를 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때 또 다른 벳새다 사람 안드레가 나섰습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9절)







안드레는 옆에서 빌립에게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의 강조점을 제대로 들었습니다..




<어디서> 빵을 살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보리떡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한 아이를 발견했습니다..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한 아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볼 때, 그 분량은 아이가 한 두끼 먹을 수 있는 정도인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빌립의 말처럼 한 입씩만 먹으면 꽤 여러 명이 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서 가장 배고픈 사람 몇 사람은 먹일 수 있을 것입니다..







안드레도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으로 생각했을까요?




분명한 것은 안드레도 확신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라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안드레가 빌립과 분명히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빌립에게 없는 예수님께 대한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비록 확신 있는 믿음은 아닐지라도, 주님께서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뭔가 하시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가졌던 것입니다..







안드레도 남자만해도 오천 명이 모여 있는 현실을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안드레는 현실 감각이 부족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현실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러나 빌립과 다른 점은 현실에 압도당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께 대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확신은 아니더라도 뭔가 주님께서 하실 수 있지 않을까하는 주님께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작은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한 아이를 예수님께 데려온 것입니다..




그러나 안드레가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가 다였습니다..







그다음부터는 예수님께서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하십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배고픈 사람들이 우글거리던 들판은 행복한 만찬의 장소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가족들을 식탁에 둘러앉힌 후 떡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올리는 가장처럼, 그렇게 대가족을 자연의 식탁에 앉히신 후 식사 기도를 올리십니다(11절)..




그리고는 자애로운 아버지가 자녀들의 접시에 떡을 떼어 주시듯, 그렇게 떡과 고기를 나눠 주십니다.. 서빙은 제자들 담당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식탁에서 자녀들을 배불리 먹이듯, 예수님은 사람들을 모두 실컷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음식을 다 거두게 하였는데, 큰 광주리로 열두 개나 되었습니다(12,13절)..







<열둘>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이 표적을 통해, 신약의 새 백성들에게 생명을 풍성하게 나누어 주시는 분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이 시험 후에 빌립은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자신의 부족한 점을 깊이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어떤 제자보다도 빌립에게 오병이어 표적은 잊을 수 없는 표적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후로 그는 현실적인 문제가 압박해 올 때마다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을 기대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빌립처럼, 예수님께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면 이 풍성한 생명을 얻을 수도 누릴 수도 없습니다.. 그저 현실에 압도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입에서는 늘 <안된다, 어렵다, 불가능하다, 할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 하게 됩니다..







우리가 만나는 현실은 대개, <한 사람 한 사람이 떡을 한 입씩만 먹는다고 해도, 이백 데나리온 어치의 떡으로도 부족한> 경우가 많습니다..




계산이 빤히 나옵니다.. 우리가 계산기를 두드려보면,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분명해 집니다..







그런데 대개는 빌립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현실에 압도되어 무력감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주어졌지만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은 오히려 나의 무능과 현실적 불가능을 보여주는 말씀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현실에 압도되어 산다면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예수님의 제자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압도되어 산다면 얼마나 불쌍한 일입니까?







예수님의 제자가, 능력의 한계에 압도되어 무능력을 한탄하며 산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람이, 운명에 압도되어 어두움 속에 산다면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시험을 통해 빌립을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신 것처럼, 우리를 시험하셔서 <계산으로는 도저히 나오지 않는 세계>를 경험하도록 하십니다..







우리의 경험과 지식에서 나오는 문제 해결 방법은 몇 가지에 불과하지만, 주님의 문제 해결 방법은 무한대입니다..




그야말로 주님은 창조주의 창조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가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주님께 기대할 수 있습니다..







물론, 어떤 기대는 우리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아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결코 자신을 기대하고 나오는 자들을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많은 사람들은 병 고치심을 기대하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고쳐 주실 뿐 아니라, 떡과 고기로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떡과 고기로 배불러진 사람들은 이제 떡과 고기를 기대하며 나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떡과 고기를 주시지 않고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무리들은 실망해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님께서 그들을 실망시키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들에게 육적인 생명 뿐 아니라 영적인 생명을 주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결코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눈에는 실망스러워 보일지라도 그것은 더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시는 주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신뢰할 만한 유일한 주님이십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을 갖고 계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현실에 대한 냉철한 판단과 계산도 해야 하겠지만, 그것과 함께 우리는 항상 주님께 대한 기대도 해야 합니다..







내 인생에 대해서, 현재 처한 상황에 대해서, 쉽게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 우리의 지식과 경험에 기초한 뻔한 계산을 하면서 좌절하지 말고, 주님께 기대해야 합니다..







내 진로에 대해서, 내 가정에 대해서, 내 자녀에 대해서, 내 신앙 생활에 대해서 계산기를 두드려 보면서 섣불리 결론 내지 말고, 주님께 대한 기대를 놓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확신이면 더욱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주님을 기대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주님은 우리의 기대를 넘어서서 일하십니다..







주님께서 풍랑이 이는 바다를 걸어서라도 제자들에게서 오신 것처럼(19절), 반드시 우리에게 오십니다..




우리가 그 분을 영접하여 드린다면, 우리의 인생은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21절)..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주님을 생각하고, 항상 주님께 기대를 거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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